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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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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장 10절 칼럼n - 돈의 유혹과 진정한 행복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현대 사회에서 돈은 생존의 필수 요소로 여겨진다. 우리는 먹고, 입고, 살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경고한다. 이 말씀은 돈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잘못된 태도가 우리를 파괴로 이끌 수 있음을 깨우쳐 준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미묘하게 우리 삶에 스며든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하거나, 부를 과시하며 타인을 깎아내리는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예를 들어, 소셜 미디어는 값비싼 명품이나 화려한 여행 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관계와 내면의 평화에서 온다.

돈을 탐하는 이들은 종종 ‘미혹’에 빠진다. 이 미혹은 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거짓 믿음이다. 하지만 돈은 건강, 사랑, 신뢰를 살 수 없다. 한 예로, 고액 연봉을 받는 직장인이 과로로 건강을 잃거나 가족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돈은 잠시 위안을 줄지 몰라도, 근본적인 공허함을 채우지 못한다. 성경은 이러한 탐욕이 결국 “많은 근심”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는 돈을 쫓던 이들이 마주하는 불안, 스트레스, 그리고 영적 갈증을 정확히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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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돈과 어떻게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먼저, 돈을 삶의 도구로 보고, 그것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돈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일 뿐, 삶의 목적이 아니다. 둘째, 나눔의 가치를 실천하자. 연구에 따르면, 타인을 위해 돈을 사용할 때 우리는 더 큰 행복을 느낀다. 작은 기부나 이웃을 위한 선행은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마지막으로, 내면의 믿음과 가치를 우선시하자. 가족, 친구, 그리고 신앙은 돈이 줄 수 없는 깊은 만족을 선사한다.

돈은 유용한 도구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는다. 디모데전서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돈을 쫓는 대신, 사람과 신뢰, 그리고 진정한 기쁨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근심이 아닌 평화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지갑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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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2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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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2장 2절 칼럼n - 나의 반석, 나의 요새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삶은 때로 거친 파도가 되어 우리를 덮칩니다. 예상치 못한 시련, 끝없이 이어지는 불확실성, 그리고 마음을 짓누르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풍경입니다. 이런 순간, 우리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요? 사무엘하 22장 2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이 짧은 구절은 깊은 위로와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누구나 폭풍 속에서 흔들릴 때, 굳건한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였지만, 사울의 추격, 전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개인적인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반석”과 “요새”로 묘사합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기초, 요새는 안전한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단순한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힘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특정 신앙을 가진 이들뿐 아니라, 삶의 무게를 느끼는 모든 이에게 공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폭풍을 마주합니다. 누군가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누군가는 관계의 갈등으로, 또 다른 이는 건강 문제나 내면의 불안으로 고통받습니다. 이런 순간, 우리는 무엇을 반석으로 삼고 있나요? 돈, 성공, 인간관계, 혹은 자기 자신? 이들은 소중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돈은 고갈되고, 성공은 덧없으며, 사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반석은 다릅니다. 그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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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건지시는 자”라는 표현은 특히 강렬합니다. 이는 단순히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넘어, 우리를 붙잡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이는 종교적 신념을 떠나, 우리 모두가 바라는 희망의 본질입니다. 누군가는 가족의 사랑에서, 또 다른 이는 우정이나 삶의 목적에서 이 “건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넘어지게 두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절망 속에서도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이 구절은 또한 우리의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를 줍니다. 다윗은 강한 전사였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움을 청했고, 그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증거입니다. 친구에게 마음을 열거나,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거나, 혹은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더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웁니다.

사무엘하 22장 2절은 단순한 종교적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외침입니다. 삶의 폭풍 속에서 우리는 모두 안정과 보호, 그리고 구원을 갈망합니다. 다윗의 고백은 그 갈망에 응답합니다. 당신의 반석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지켜주는 요새는 어디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며, 우리는 각자의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파도라도 이겨낼 힘을 찾을 것입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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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목사
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2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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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12장 14절 칼럼n -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

역대하 12장 14절에 기록된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는 말씀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르호보암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선택이 개인과 공동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가 삶의 방향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보여준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며 큰 책임을 맡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백성을 바르게 인도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않았다. 여기서 ‘굳게 하지 않다’는 표현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순위에서 밀쳐낸 태도를 드러낸다. 그는 세속적인 힘, 부, 그리고 정치적 안정에 더 큰 가치를 두었고, 결국 잘못된 선택으로 나라를 분열과 고난으로 이끌었다.

이 구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무엇을 우선순위로 삼을지, 어떤 가치를 추구할지는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다. 르호보암처럼, 우리도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소홀히 할 때가 있다. 직업, 돈, 관계, 성공 같은 세상적인 목표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할 때, 우리는 점차 중심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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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따르는 것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분께 의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거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은 마음을 굳게 하는 실천이다. 또한,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도 포함된다.

르호보암의 실패는 우리에게 경고이자 교훈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대가를 치렀다. 반면, 성경은 다윗이나 요시야처럼 하나님을 구하며 마음을 굳게 한 이들의 삶을 통해, 그런 선택이 얼마나 큰 축복과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려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무엇에 중심을 두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바쁜 일상, 끝없는 경쟁,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우리는 쉽게 길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은 또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르호보암의 잘못된 선택은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결정은 온 백성에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 역시 개인의 선택이 가족, 친구, 사회에 파급효과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은 우리를 사랑과 책임감으로 이끌며,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결국, 역대하 12장 14절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며,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다짐하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한다. 그럴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경험할 것이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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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2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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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3장 14절 칼럼n - 광야의 믿음: 다윗의 피난과 우리의 삶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삶은 때로 광야와 같다. 척박하고, 고립되고, 위협이 도사리는 곳. 사무엘상 23장 14절에서 다윗은 사울의 끊임없는 추격 속에 광야의 요새와 십 광야의 산골을 떠돌며 피신한다. 그는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였지만, 그 순간에는 도망자일 뿐이었다. 사울은 매일 그를 찾아다녔지만, 성경은 단호히 말한다: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이 구절은 다윗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신앙의 여정을 담고 있다.

광야는 단순히 지리적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두려움, 불확실성, 고난 속에서 마주하는 삶의 순간을 상징한다. 직장을 잃거나, 건강이 흔들리거나, 인간관계가 어그러질 때, 우리는 마치 광야를 헤매는 듯하다. 다윗처럼, 우리도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며 하나님께 묻곤 한다. 그러나 다윗의 광야는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드러나는 무대였다.

다윗은 광야에서 무엇을 했을까? 그는 도망쳤지만, 결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시편 57편과 142편은 다윗이 동굴과 광야에서 부른 기도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리이다”(시 57:1). 그는 절망 대신 하나님께 피했다. 광야는 그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신앙을 단련시키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게 했다. 우리도 광야의 순간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고난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성장의 기회로 바꾼다.

하나님의 보호는 때로 극적이지 않다. 다윗은 천사의 호위를 받거나 하늘에서 불기둥이 내려오는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은 조용히 그를 사울의 손에서 지키셨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기적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병원 침대 옆의 가족의 손길, 예상치 못한 친구의 위로, 내면의 평안—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이다. 다윗의 광야는 하나님이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증거였다. 우리의 광야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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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광야를 피하려 한다. 편안함과 안정만을 추구하지만, 삶은 예측 불가능하다. 경제적 위기, 사회적 갈등, 개인적 상실은 언제든 우리를 광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다윗의 이야기는 광야가 끝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광야를 지나 결국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다. 우리의 광야도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를 준비시키는 과정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믿음의 본질을 일깨운다. 믿음은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도, 사울의 창이 날아올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윗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는 말씀은 오늘도 유효하다.

광야는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한다. 다윗의 광야는 그의 믿음의 승리였다. 우리의 광야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신이 광야에 있다면, 다윗처럼 하나님께 피하라. 당신을 쫓는 사울이 무엇이든,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그 손에 넘기지 않으신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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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20.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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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5절 칼럼n - 선악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의 선택과 깨달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장 5절 말씀은 인간의 본성과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한 깨달음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구절은 단순히 성경 속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질문과 마주하게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우리는 어떻게 선택하며, 그 선택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이 말씀에서 뱀은 이브에게 금지된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유혹합니다. 여기서 ‘눈이 밝아진다’는 표현은 단순한 시각적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단순히 본능에 따라 사는 존재를 넘어, 도덕적 판단과 책임감을 지닌 존재로 나아가는 전환점입니다. 하지만 이 깨달음은 축복인 동시에 무거운 짐이 됩니다. 선악을 아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고,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감당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매일 선악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놀라운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윤리적 딜레마를 안깁니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지만, 프라이버시 침해나 고용 불안 같은 문제를 동반합니다. 환경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편리함을 위해 플라스틱을 사용할 것인지, 미래 세대를 위해 불편을 감수할 것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이처럼 선악을 아는 능력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책임이라는 무게를 지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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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또한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을 돌아보게 합니다. 뱀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 반쪽짜리 약속이었습니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나 권능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선택은 고통과 분리를 초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자신의 지식과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힙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소중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첫째, 선택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지만,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우리는 매 순간 무엇이 옳은지 고민하고, 그 결과를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둘째, 진정한 깨달음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악을 아는 것은 지혜와 사랑,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비록 인간이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창세기 3장 5절은 수천 년 전 이야기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선악의 나무 앞에 서 있는 이브와 같습니다. 무엇을 선택할지, 그 선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바로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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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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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1-2절 칼럼n - 천사의 얼굴을 한 낯선 이웃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 구절은 성경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의미는 종교를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사랑과 환대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만나는 낯선 이가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선물일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이 글에서는 이 구절이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떻게 울림을 줄 수 있는지, 일상 속 작은 실천이 어떻게 큰 변화를 낳는지 탐구해보고자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낯선 이를 경계한다.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 경계를 넘어설 것을 제안한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는 말은 가까운 이웃뿐 아니라 낯선 이에게도 마음을 열라는 초대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도시의 높은 아파트, 스마트폰 화면 속 세상은 우리를 물리적·정서적으로 분리시킨다. 이런 때일수록 작은 친절이 빛을 발한다. 길에서 길을 묻는 이를 돕거나, 낯선 이에게 미소를 건네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 순간 우리는 누군가에게 ‘천사’가 될 수 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문장은 환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환대는 단순히 문을 여는 행위가 아니다. 마음을 여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문화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낯선 이를 제우스의 사자로 여겼고, 동양에서는 손님을 귀하게 대접하는 전통이 깊게 뿌리내렸다. 오늘날에도 이 정신은 이어진다. 예를 들어,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집을 잃은 난민을 받아들이는 가정, 혹은 길에서 굶주린 이를 위해 음식을 나누는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 단지 사람이기에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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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는 대목이다. 이 말은 우리가 베푼 친절이 단순한 호의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몇 해 전, 한 남성이 우연히 길에서 만난 노숙자에게 자신의 점심을 나눠준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 있다. 나중에 그는 그 노숙자가 오랜 친구를 찾기 위해 떠돌던 음악가였음을 알게 됐다. 그들은 다시 만나 우정을 회복했고, 남성은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할 선물로 기억했다. 이처럼 우리가 만나는 낯선 이는 우리의 삶에 뜻밖의 기쁨을 가져올 수 있다.

물론 모든 만남이 드라마틱한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우리의 친절이 보답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가치는 결과에 있지 않다. 사랑과 환대를 실천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든다. 낯선 이에게 문을 여는 것은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 그리고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씨앗이다. 

오늘 하루, 우리는 어떤 천사를 만날까?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천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들에게 천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랑과 환대는 종교나 국경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마음이다. 그러니 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보자. 어쩌면 그 작은 행동이 누군가의 삶에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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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목사
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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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장 9절 칼럼n - 평안을 묻는 그 한 마디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누군가가 다정한 눈빛으로 “괜찮아요?”, “평안하신가요?”라고 물어오는 순간, 우리는 어쩐지 마음이 풀린다. 그 짧은 말에 위로와 관심, 따뜻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사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말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28장 9절에 이런 장면이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을 만나 첫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평안하냐.” 그 짧은 인사 속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존재가 가장 먼저 건넨 말이, “너 괜찮니?”, “마음은 평안하니?”였다는 것은, 신앙의 경계를 넘어서도 감동적이지 않은가.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자.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목격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이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충격과 절망, 혼란, 그리고 두려움. 그런 심정으로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예수는 놀랍게도 다시 살아 나타나셨고, 가장 먼저 “평안하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나는 살아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의 아픔과 혼란을 안다. 이제 평안하길 바란다.”라는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여인들은 그 말을 듣고 곧장 예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 위로와 회복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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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인간적인 울림이 있다. 삶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고난을 준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 예상치 못한 실패, 마음의 상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 우리는 이런 감정들을 품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누군가 다정하게 다가와 “괜찮니?”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나는 네가 어떤 상황에 있든 함께하고 싶다”는 말과 같다.

예수가 부활 후 처음 한 일이 누군가의 고통과 혼란 속으로 다가가 마음을 묻는 것이었다면, 우리 역시 그런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이 있든 없든, 그 질문 하나로 누군가의 하루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어떤 위대한 논리나 감동적인 연설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평안하냐”는 말 한마디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도 그 물음이 닿았으면 한다.

“평안하신가요?”

오늘 그 말을 누군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조심스레 건네보면 어떨까.  
어쩌면 그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살리고, 당신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시작이 될 수 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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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목사
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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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21절 칼럼n - 가죽옷에 담긴 사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 짧은 구절은 단순한 옷 짓는 행위를 넘어 깊은 사랑과 돌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은 후, 그들은 부끄러움과 두려움 속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서툰 시도를 넘어, 직접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 장면은 인간의 부족함을 덮어주고 보호하려는 따뜻한 손길을 보여준다.

가죽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생을 동반한 선물이었다. 가죽을 얻기 위해 동물이 죽어야 했듯, 하나님의 돌봄에는 대가가 따랐다. 이 구절은 사랑이란 때로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임을 말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인을 위해 우리의 시간, 마음, 자원을 내어주는가? 바쁜 일상 속에서 누군가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적은 없는가?

이 가죽옷은 또한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낙원에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셨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위로가 된다. 실수하고 넘어질 때, 우리는 스스로를 책망하거나 숨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누군가가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가족, 친구, 혹은 낯선 이의 작은 친절 속에서도 우리는 그런 돌봄을 발견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화려한 옷, 성공의 상징들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짓는 듯 보인다. 하지만 가죽옷은 단순함 속에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외모나 지위가 아닌, 누군가를 향한 마음에서 비롯된 보호와 사랑의 상징이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가죽옷’을 입혀줄 수 있지 않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 귀 기울이는 시간, 작은 도움의 손길이 누군가의 차가운 현실을 덮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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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옷 이야기는 또한 희망의 메시지다. 죄와 단절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입고 낙원을 떠났지만, 그 옷은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실패와 상실 속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그 손길은 때로 가족의 위로, 친구의 격려, 혹은 예상치 못한 낯선 이의 도움으로 나타난다.

이 구절은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인간관계 속 따뜻함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누군가를 보호하며 살아간다. 가죽옷은 그 연결고리를 상징한다. 오늘, 당신은 누구에게 가죽옷을 입혀줄 수 있는가?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그런 옷을 입혀주었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끈다.

결국, 가죽옷은 사랑의 언어다. 그것은 부족한 우리를 감싸주고, 새로운 길을 걸을 용기를 준다. 창세기의 이 작은 이야기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한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나며, 그 행동은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고. 그러니 오늘, 누군가에게 가죽옷 같은 사랑을 건네보자. 그 단순한 행위가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 것이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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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