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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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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장 9절 칼럼n - 평안을 묻는 그 한 마디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누군가가 다정한 눈빛으로 “괜찮아요?”, “평안하신가요?”라고 물어오는 순간, 우리는 어쩐지 마음이 풀린다. 그 짧은 말에 위로와 관심, 따뜻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사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말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28장 9절에 이런 장면이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을 만나 첫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평안하냐.” 그 짧은 인사 속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존재가 가장 먼저 건넨 말이, “너 괜찮니?”, “마음은 평안하니?”였다는 것은, 신앙의 경계를 넘어서도 감동적이지 않은가.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자.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목격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이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충격과 절망, 혼란, 그리고 두려움. 그런 심정으로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예수는 놀랍게도 다시 살아 나타나셨고, 가장 먼저 “평안하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나는 살아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의 아픔과 혼란을 안다. 이제 평안하길 바란다.”라는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여인들은 그 말을 듣고 곧장 예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 위로와 회복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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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인간적인 울림이 있다. 삶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고난을 준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 예상치 못한 실패, 마음의 상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 우리는 이런 감정들을 품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누군가 다정하게 다가와 “괜찮니?”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나는 네가 어떤 상황에 있든 함께하고 싶다”는 말과 같다.

예수가 부활 후 처음 한 일이 누군가의 고통과 혼란 속으로 다가가 마음을 묻는 것이었다면, 우리 역시 그런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이 있든 없든, 그 질문 하나로 누군가의 하루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어떤 위대한 논리나 감동적인 연설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평안하냐”는 말 한마디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도 그 물음이 닿았으면 한다.

“평안하신가요?”

오늘 그 말을 누군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조심스레 건네보면 어떨까.  
어쩌면 그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살리고, 당신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시작이 될 수 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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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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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21절 칼럼n - 가죽옷에 담긴 사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 짧은 구절은 단순한 옷 짓는 행위를 넘어 깊은 사랑과 돌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은 후, 그들은 부끄러움과 두려움 속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서툰 시도를 넘어, 직접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 장면은 인간의 부족함을 덮어주고 보호하려는 따뜻한 손길을 보여준다.

가죽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생을 동반한 선물이었다. 가죽을 얻기 위해 동물이 죽어야 했듯, 하나님의 돌봄에는 대가가 따랐다. 이 구절은 사랑이란 때로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임을 말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인을 위해 우리의 시간, 마음, 자원을 내어주는가? 바쁜 일상 속에서 누군가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적은 없는가?

이 가죽옷은 또한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낙원에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셨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위로가 된다. 실수하고 넘어질 때, 우리는 스스로를 책망하거나 숨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누군가가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가족, 친구, 혹은 낯선 이의 작은 친절 속에서도 우리는 그런 돌봄을 발견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화려한 옷, 성공의 상징들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짓는 듯 보인다. 하지만 가죽옷은 단순함 속에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외모나 지위가 아닌, 누군가를 향한 마음에서 비롯된 보호와 사랑의 상징이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가죽옷’을 입혀줄 수 있지 않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 귀 기울이는 시간, 작은 도움의 손길이 누군가의 차가운 현실을 덮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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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옷 이야기는 또한 희망의 메시지다. 죄와 단절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입고 낙원을 떠났지만, 그 옷은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실패와 상실 속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그 손길은 때로 가족의 위로, 친구의 격려, 혹은 예상치 못한 낯선 이의 도움으로 나타난다.

이 구절은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인간관계 속 따뜻함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누군가를 보호하며 살아간다. 가죽옷은 그 연결고리를 상징한다. 오늘, 당신은 누구에게 가죽옷을 입혀줄 수 있는가?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그런 옷을 입혀주었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끈다.

결국, 가죽옷은 사랑의 언어다. 그것은 부족한 우리를 감싸주고, 새로운 길을 걸을 용기를 준다. 창세기의 이 작은 이야기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한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나며, 그 행동은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고. 그러니 오늘, 누군가에게 가죽옷 같은 사랑을 건네보자. 그 단순한 행위가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 것이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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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5.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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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3장 17-18절 칼럼n - 부러움 너머의 희망: 진정한 성공의 길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성공의 기준이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인정으로 점철된 오늘날, 우리는 종종 타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며 마음이 흔들린다. SNS에 넘쳐나는 화려한 삶의 단편들은 우리의 부족함을 부각시키고, 비교의 덫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성경의 지혜는 이러한 부러움이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한다. 잠언 23장 17-18절은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며 우리에게 더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이 말씀은 시대와 문화, 신앙의 유무를 초월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선, 부러움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누군가의 성공이나 행복이 우리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종종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부러움은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초점을 왜곡해 현재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동료의 승진을 보며 질투심에 사로잡힌다면, 자신의 성취나 가능성을 돌아볼 여유를 잃는다. 잠언은 이런 부러움이 일시적이고 공허한 감정임을 상기시킨다.

대신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앙을 넘어, 삶의 더 큰 목적과 가치를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의 일에서 정직함을 지키고, 타인을 돕는 데 힘쓰며, 내면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은 모두 더 큰 가치를 향한 헌신이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타인의 성공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물질적 성공보다 의미 있는 관계와 자기 성찰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더 높은 삶의 만족도를 느낀다고 한다. 이는 잠언의 지혜와 놀랍도록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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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삶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보상을 안겨준다는 희망의 메시지다. 성공은 반드시 남들과 같을 필요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화려한 경력일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과의 평온한 시간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망을 잃지 않고, 그것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지역사회의 자원봉사자는 큰돈을 벌지 못했지만, 그의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 자체로 풍성한 장래를 만들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비교의 덫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으라고 촉구한다.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며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에 충실해야 한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큰 성공을 강요한다. 하지만 잠언은 말한다. 진정한 성공은 내면의 평화와 소망에서 온다고. 이 메시지는 신앙인뿐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이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결국, 잠언 23장 17-18절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부러워하는가? 그리고 그 부러움이 당신을 어디로 이끄는가? 타인의 형통함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믿으며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끊어지지 않는 소망을 발견한다. 이 지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 삶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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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4.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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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편 7절 칼럼n - 풍성한 사랑이 이끄는 예배의 길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삶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파도와 같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여정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하지만 시편 5편 7절은 단 한 구절로 마음 깊은 곳에 따뜻한 위로와 방향을 제시한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이 말씀은 특정 종교를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사랑과 경외, 그리고 헌신이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먼저, “풍성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가슴을 두드린다. 사랑은 인류가 공유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다. 부모의 품, 친구의 위로, 낯선 이의 친절 - 우리는 크고 작은 사랑의 순간들로 삶을 버텨낸다. 이 구절은 그 사랑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상기시킨다. 누군가는 이를 신의 사랑으로, 또 누군가는 우주의 선한 에너지로 해석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사랑이 우리를 결코 외롭지 않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 어머니가 병든 아이를 위해 밤을 새우며 기도하는 모습은 이 “풍성한 사랑”이 실체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 사랑은 그녀를 지탱하고, 결국 아이를 향한 헌신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사랑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렇다면 “주의 집에 들어가”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이 머무는 곳, 우리가 진정으로 소속감을 느끼는 안식처를 상징한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모인 식탁이고, 다른 이에게는 자연 속 고요한 숲길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 속에 지친다. 2023년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70% 이상이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 피로를 느낀다고 답했다. 이런 현실에서 “주의 집”은 우리가 잠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공간이다. 한 직장인은 매일 아침 10분간 명상을 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그는 그 시간을 “내 안의 성전”이라 부른다. 이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는 안식의 공간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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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경외함으로”라는 표현은 또 다른 울림을 준다. 경외는 두려움과는 다르다. 그것은 깊은 존경과 겸손이다. 우리는 삶에서 마주하는 거대한 자연, 끝없는 우주, 혹은 타인의 희생 앞에서 경외심을 느낀다. 예를 들어,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헌신한 의료진을 보며 많은 이들이 그들의 희생에 숙연해졌다. 경외는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더 큰 가치를 향하게 한다. 이 구절은 예배를 통해 그 경외심을 표현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배는 단순히 종교적 의식이 아니다. 한 학생이 스승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는 것, 자원봉사자가 노인 요양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 이 모두가 경외심에서 비롯된 예배의 형태다.

마지막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는 결심의 선언이다. 삶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우리는 방향을 잡고 나아가겠다는 의지다. 현대인은 종종 목표를 잃는다. SNS는 끊임없이 남들의 삶을 보여주며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말한다. 진정한 예배는 외부의 소음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한 예로, 40대 회사원인 김 씨는 몇 년 전 번아웃으로 모든 걸 놓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등산을 시작했고, 산 정상에서 느끼는 고요함이 그를 살렸다. 그는 매주 산을 오르며 자신만의 “예배”를 드린다. 그것은 그에게 삶의 목적을 되찾게 했다.

시편 5편 7절은 단순한 종교적 문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시작해 경외로 이어지고, 결국 헌신으로 완성되는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성전”을 향해 걷는다. 그 길에서 풍성한 사랑은 우리를 이끄는 등불이다. 이 메시지는 종교, 국경, 시대를 초월해 누구나의 가슴에 닿는다. 오늘, 당신은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예배는 당신을 어디로 이끄는가? 잠시 멈춰 그 길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갈 힘을 얻는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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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3.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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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0장 42절 칼럼n - 싸우시는 하나님, 우리의 희망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

성경 구절 하나가 때로는 깊은 위로와 깨달음을 준다. 여호수아 10장 42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 이 말씀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희망을 주는 메시지다.

삶은 종종 전쟁터와 같다. 일터에서의 경쟁, 가정에서의 갈등,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때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고, 홀로 싸워야 하는 외로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싸움을 대신해 주신다고 말한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강대한 적들을 마주했을 때, 그들의 승리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가능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편에서 싸우신다.

하나님의 싸움은 단순히 외적인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얻었지만, 그들의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과의 동행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공뿐 아니라 마음의 평안, 관계의 회복, 그리고 삶의 의미를 주신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던 누군가가 기도하며 마음을 다잡고, 결국 예상치 못한 기회로 상황이 바뀌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신다는 증거다.

이 구절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단번에’라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개입은 때로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순간, 놀라운 속도로 이루어진다. 몇 년간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하루아침에 풀리거나, 오랜 갈등이 한 번의 대화로 정리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이는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지쳤을 때, 포기하고 싶을 때,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개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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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말씀을 읽으며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왜 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나?” “하나님은 정말 내 편인가?”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다. 여호수아의 승리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수많은 전투와 기다림,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의 여정을 아시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더 큰 그림을 그리신다. 지금 당장 승리가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이 구절은 모든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준다. 종교적 배경이 없더라도, 우리는 모두 삶의 무게를 느끼고, 누군가 우리를 위해 싸워주길 바란다. 여호수아 10장 42절은 그 ‘누군가’가 우리 곁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넘어질 때 손을 내미신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삶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힘이다.

오늘, 당신의 싸움은 무엇인가? 경제적 어려움, 건강 문제, 혹은 마음의 상처일 수 있다. 어떤 상황이든, 이 말씀은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싸우신다. 그분의 방법과 시간은 다를지라도, 그분의 약속은 변함없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승리했듯, 당신도 결국 승리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하나님의 싸움을 믿으며, 오늘의 전투를 이겨내보자. 당신의 삶에도 ‘단번에’라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이 희망이 우리 모두를 새롭게 한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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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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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21절 칼럼n - 질문 속의 인간다움: 궁금함이 이끄는 여정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21장 21절, 베드로가 예수께 묻는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이 짧은 구절은 단순한 질문 이상의 깊은 인간적 울림을 담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뒤, 자신의 운명에 대한 대화 속에서 갑자기 요한을 가리키며 그의 미래를 묻는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그 안에 더 깊은 무언가가 숨어 있을까? 이 구절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우리 모두는 때로 다른 이의 삶을 궁금해하고, 그들의 여정을 통해 우리의 위치를 가늠하려 한다. 이 글은 베드로의 질문에서 시작해, 그 속에 담긴 보편적 인간다움을 탐구하며 우리 삶에 던지는 메시지를 찾아본다.

베드로의 질문은 먼저 인간의 호기심을 보여준다. 그는 예수님과 대화하던 중, 문득 요한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이는 우리도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순간이다. 친구가 새로운 직장을 얻었을 때, 동료가 뜻밖의 성공을 거두었을 때, 혹은 누군가의 삶이 우리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흐를 때, 우리는 묻는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이 호기심은 단순한 부러움이나 질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본능적 욕구다. 베드로는 요한의 운명을 묻는 순간, 어쩌면 자신의 역할과 의미를 더 깊이 고민했을지 모른다. 우리 역시 타인의 삶을 궁금해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러나 이 질문에는 비교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헌신과 충성에 대해 들은 직후, 요한의 미래를 묻는다. 이는 인간의 비교 본능을 드러낸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성공, 행복, 혹은 고난을 보며 자신의 삶을 저울질한다. “왜 저 사람은 저보다 더 잘 사는 걸까?”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이러한 생각은 베드로의 질문과 닿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은 날카롭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비교의 덫에서 벗어나 각자의 길을 충실히 걷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베드로에게 요한의 미래는 그의 소명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타인의 궤적과 비교하며 방향을 잃을 때가 많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네 길을 얼마나 성실히 걷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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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뒤에는 또한 신뢰의 문제가 숨어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계획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요한의 미래를 확인하려 했을지 모른다. 이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리는 종종 답을 요구한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 “이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운명을 설명하지 않고, 대신 그를 믿고 따를 것을 요청하신다. 이는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메시지다. 삶의 모든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신뢰 속에서 한 발짝 내딛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의미를 만든다. 베드로의 질문은 인간적인 약함을 보여주지만, 그 약함 속에서 성장하는 믿음의 여정을 암시한다.

이 구절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생각하게 한다. 베드로는 요한을 단순히 개인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질문은 요한의 미래뿐 아니라, 그들이 함께 걷는 여정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도 가족, 친구, 동료들과 얽힌 삶을 산다. 누군가의 성공은 우리의 기쁨이 되고, 누군가의 고난은 우리의 아픔이 된다. 베드로의 질문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까?”라는 공동체적 물음으로 확장된다. 이는 우리가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성장하며 지지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베드로의 이 한 마디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을 건드린다. 우리는 궁금해하고, 비교하고, 불안해하며, 때로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이 모든 감정과 질문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답변, “너는 나를 따르라”는 이 모든 복잡한 감정 속에서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향을 제시한다. 타인의 삶을 궁금해하는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결국 우리의 소명은 우리만의 길을 충실히 걷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처럼 묻는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하지만 그 질문만큼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다. 이 구절은 우리를 질문하는 존재로,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존재로 초대한다. 궁금함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믿음은 우리를 이끈다. 베드로의 질문은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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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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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22절 칼럼n - 네 길을 가라, 남의 길은 신경 쓰지 말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삶은 때로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친구가 더 좋은 직장을 얻었을 때, 동료가 더 빠르게 승진했을 때, 혹은 누군가가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일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질투나 불안이 고개를 듭니다. 성경 구절인 요한복음 21:22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은 이런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타인의 삶이 아닌, 우리 자신의 길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요한에 대해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졌던 터라, 다른 제자의 운명이 궁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요한이 어떤 삶을 살든, 그것은 베드로의 길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라는 초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합니다. 누군가의 화려한 여행 사진, 성공 스토리, 완벽해 보이는 가정은 우리의 부족함을 부각시키곤 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1:22은 묻습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타인의 삶은 그들의 것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입니다. 남의 길을 부러워하거나 판단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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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다른 사람의 기대나 판단에서 벗어나,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누군가는 일찍 결혼하고, 누군가는 늦게 경력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평생 한 가지 일을 고집하고, 어떤 이는 여러 길을 탐색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며, 우리에게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다독입니다.

종교적인 맥락을 떠나서도 이 구절은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비교는 행복을 앗아가고, 집중은 평화를 가져옵니다. 철학자 니체는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했고, 동양의 도가사상 역시 “자연의 흐름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요한복음 21:22은 이런 지혜와 맞닿아 있습니다. 남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데 집중할 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경쟁을 부추기고,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중심으로 돌려놓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라는 부분은 타인의 삶이 우리 이해를 넘어설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의 길이 길든 짧든, 빛나든 어둡든, 그것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우리 앞에 놓인 길을 성실히 걷는 것뿐입니다.

결국, 요한복음 21:22은 우리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비교와 질투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만의 소명을 발견하고 따르라는 초대입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우리는 각자 삶의 주인공입니다. 남의 이야기에 연연하기보다, 내 이야기를 쓰는 데 집중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순간, 한 번 물어보세요. “나는 내 길을 가고 있는가?” 그 대답이 당신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 것입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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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장 24절 칼럼n - 초대받은 자리의 빈자리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누구나 한 번쯤 초대받은 자리에 가지 못하거나, 초대를 거절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한 주인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이 핑계를 대며 오지 않자 다른 이들을 대신 초대한다는 비유에서 나온다. 언뜻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말씀은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는지, 어떤 초대에 응답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현대인의 삶은 바쁘다. 일, 가족, 취미, 소셜 미디어까지 - 우리는 매일 수많은 초대와 요구에 둘러싸여 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전화, 가족과의 저녁 식사, 혹은 조용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갖자는 마음의 속삭임. 하지만 우리는 종종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핑계로 소중한 초대를 거절한다. 누가복음의 비유 속 초대받은 이들도 그랬다. 땅을 보러 가야 하고, 소를 시험해야 하며, 결혼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그들의 핑계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진짜 중요한 자리를 놓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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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는 단순히 종교적인 메시지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관계, 기회, 그리고 자기 성찰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군가의 초대를 거절할 때, 우리는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친구가 더 이상 연락하지 않고, 가족이 점점 멀어지고, 나를 위한 시간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초대는 한정적이고,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 말씀은 희망을 준다. 처음 초대받지 못했던 이들 - 길거리와 골목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 이 잔치에 들어왔다. 이는 우리에게도 두 번째 기회가 올 수 있음을 암시한다. 내가 놓친 자리를 후회하며 주저할 때, 예상치 못한 초대가 찾아올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때 “예”라고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다.

결국 이 구절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지 결정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사랑, 기쁨, 평화를 주는 자리를 떠나보낼 것인가? 아니면 용기를 내어 그 잔치에 들어갈 것인가? 누가복음 14장 24절은 종교를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 초대에 응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빈자리는 언제나 채워진다. 다만, 그 자리에 내가 있을지는 나의 선택에 달렸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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