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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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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21절 칼럼n - 질문 속의 인간다움: 궁금함이 이끄는 여정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21장 21절, 베드로가 예수께 묻는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이 짧은 구절은 단순한 질문 이상의 깊은 인간적 울림을 담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뒤, 자신의 운명에 대한 대화 속에서 갑자기 요한을 가리키며 그의 미래를 묻는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그 안에 더 깊은 무언가가 숨어 있을까? 이 구절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우리 모두는 때로 다른 이의 삶을 궁금해하고, 그들의 여정을 통해 우리의 위치를 가늠하려 한다. 이 글은 베드로의 질문에서 시작해, 그 속에 담긴 보편적 인간다움을 탐구하며 우리 삶에 던지는 메시지를 찾아본다.

베드로의 질문은 먼저 인간의 호기심을 보여준다. 그는 예수님과 대화하던 중, 문득 요한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이는 우리도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순간이다. 친구가 새로운 직장을 얻었을 때, 동료가 뜻밖의 성공을 거두었을 때, 혹은 누군가의 삶이 우리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흐를 때, 우리는 묻는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이 호기심은 단순한 부러움이나 질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본능적 욕구다. 베드로는 요한의 운명을 묻는 순간, 어쩌면 자신의 역할과 의미를 더 깊이 고민했을지 모른다. 우리 역시 타인의 삶을 궁금해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러나 이 질문에는 비교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헌신과 충성에 대해 들은 직후, 요한의 미래를 묻는다. 이는 인간의 비교 본능을 드러낸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성공, 행복, 혹은 고난을 보며 자신의 삶을 저울질한다. “왜 저 사람은 저보다 더 잘 사는 걸까?”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이러한 생각은 베드로의 질문과 닿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은 날카롭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비교의 덫에서 벗어나 각자의 길을 충실히 걷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베드로에게 요한의 미래는 그의 소명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타인의 궤적과 비교하며 방향을 잃을 때가 많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네 길을 얼마나 성실히 걷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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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뒤에는 또한 신뢰의 문제가 숨어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계획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요한의 미래를 확인하려 했을지 모른다. 이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리는 종종 답을 요구한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 “이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운명을 설명하지 않고, 대신 그를 믿고 따를 것을 요청하신다. 이는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메시지다. 삶의 모든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신뢰 속에서 한 발짝 내딛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의미를 만든다. 베드로의 질문은 인간적인 약함을 보여주지만, 그 약함 속에서 성장하는 믿음의 여정을 암시한다.

이 구절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생각하게 한다. 베드로는 요한을 단순히 개인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질문은 요한의 미래뿐 아니라, 그들이 함께 걷는 여정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도 가족, 친구, 동료들과 얽힌 삶을 산다. 누군가의 성공은 우리의 기쁨이 되고, 누군가의 고난은 우리의 아픔이 된다. 베드로의 질문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까?”라는 공동체적 물음으로 확장된다. 이는 우리가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성장하며 지지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베드로의 이 한 마디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을 건드린다. 우리는 궁금해하고, 비교하고, 불안해하며, 때로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이 모든 감정과 질문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답변, “너는 나를 따르라”는 이 모든 복잡한 감정 속에서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향을 제시한다. 타인의 삶을 궁금해하는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결국 우리의 소명은 우리만의 길을 충실히 걷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처럼 묻는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하지만 그 질문만큼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다. 이 구절은 우리를 질문하는 존재로,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존재로 초대한다. 궁금함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믿음은 우리를 이끈다. 베드로의 질문은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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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의 말씀칼럼2025. 4. 1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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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22절 칼럼n - 네 길을 가라, 남의 길은 신경 쓰지 말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삶은 때로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친구가 더 좋은 직장을 얻었을 때, 동료가 더 빠르게 승진했을 때, 혹은 누군가가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일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질투나 불안이 고개를 듭니다. 성경 구절인 요한복음 21:22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은 이런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타인의 삶이 아닌, 우리 자신의 길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요한에 대해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졌던 터라, 다른 제자의 운명이 궁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요한이 어떤 삶을 살든, 그것은 베드로의 길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라는 초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합니다. 누군가의 화려한 여행 사진, 성공 스토리, 완벽해 보이는 가정은 우리의 부족함을 부각시키곤 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1:22은 묻습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타인의 삶은 그들의 것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입니다. 남의 길을 부러워하거나 판단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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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다른 사람의 기대나 판단에서 벗어나,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누군가는 일찍 결혼하고, 누군가는 늦게 경력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평생 한 가지 일을 고집하고, 어떤 이는 여러 길을 탐색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며, 우리에게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다독입니다.

종교적인 맥락을 떠나서도 이 구절은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비교는 행복을 앗아가고, 집중은 평화를 가져옵니다. 철학자 니체는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했고, 동양의 도가사상 역시 “자연의 흐름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요한복음 21:22은 이런 지혜와 맞닿아 있습니다. 남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데 집중할 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경쟁을 부추기고,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중심으로 돌려놓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라는 부분은 타인의 삶이 우리 이해를 넘어설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의 길이 길든 짧든, 빛나든 어둡든, 그것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우리 앞에 놓인 길을 성실히 걷는 것뿐입니다.

결국, 요한복음 21:22은 우리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비교와 질투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만의 소명을 발견하고 따르라는 초대입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우리는 각자 삶의 주인공입니다. 남의 이야기에 연연하기보다, 내 이야기를 쓰는 데 집중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순간, 한 번 물어보세요. “나는 내 길을 가고 있는가?” 그 대답이 당신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 것입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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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2장 24절 칼럼n - 마음을 다해 섬기는 삶의 의미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이 구절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일지라도,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종교적 신념을 떠나, 이 문장은 삶에서 감사와 헌신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했다면, 그에 대한 응답으로 진심을 다해 보답하려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먼저, “그 큰 일을 생각하라”는 초대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부모의 희생, 친구의 도움, 혹은 낯선 이의 작은 친절까지,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은혜를 받는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깨어 자식의 숙제를 도운 기억이나, 어려운 시기에 친구가 내민 손길은 결코 잊히지 않는 ‘큰 일’이다. 이 구절은 그런 순간들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추라고 권한다. 현대 사회에서 바쁜 일상에 치여 잊기 쉬운 이 감정은, 사실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다음으로, “경외하며 섬기라”는 말은 단순한 감사를 넘어 행동으로 나아가라는 요청이다. 경외란 두려움 속에 존경을 담은 마음이다. 이는 신앙의 대상뿐 아니라,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나 가치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가령,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은 환경을 보호하려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헌신에 감동했다면, 우리도 그만큼 진실하게 보답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는 종교적 맥락을 넘어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서 공정함과 책임을 다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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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하여 진실히”라는 표현은 특히 강렬하다. 형식적이거나 억지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헌신을 강조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일, 가족,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진실되게 임하는지를 묻는다. 예컨대, 직장에서 단순히 월급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이 구절과 맞닿아 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행동은 결국 공허함만 남기지만, 마음을 다한 노력은 자신과 주변 모두에게 의미를 준다.

이 말씀은 결국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받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든, 사람을 믿든, 아니면 스스로의 가치를 믿든, 이 원칙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종종 경쟁과 효율만을 좇아 감사와 헌신을 잊는다. 하지만 이 구절은 잠시 멈춰 서서, 우리를 여기까지 이끈 ‘큰 일’들을 떠올리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것을 조용히 권면한다. 마음을 다해 섬기는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추구할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목표가 아닐까.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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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4장 24절 칼럼n - 초대받은 자리의 빈자리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누구나 한 번쯤 초대받은 자리에 가지 못하거나, 초대를 거절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한 주인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이 핑계를 대며 오지 않자 다른 이들을 대신 초대한다는 비유에서 나온다. 언뜻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말씀은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는지, 어떤 초대에 응답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현대인의 삶은 바쁘다. 일, 가족, 취미, 소셜 미디어까지 - 우리는 매일 수많은 초대와 요구에 둘러싸여 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전화, 가족과의 저녁 식사, 혹은 조용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갖자는 마음의 속삭임. 하지만 우리는 종종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핑계로 소중한 초대를 거절한다. 누가복음의 비유 속 초대받은 이들도 그랬다. 땅을 보러 가야 하고, 소를 시험해야 하며, 결혼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그들의 핑계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진짜 중요한 자리를 놓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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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는 단순히 종교적인 메시지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관계, 기회, 그리고 자기 성찰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군가의 초대를 거절할 때, 우리는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친구가 더 이상 연락하지 않고, 가족이 점점 멀어지고, 나를 위한 시간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초대는 한정적이고,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 말씀은 희망을 준다. 처음 초대받지 못했던 이들 - 길거리와 골목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 이 잔치에 들어왔다. 이는 우리에게도 두 번째 기회가 올 수 있음을 암시한다. 내가 놓친 자리를 후회하며 주저할 때, 예상치 못한 초대가 찾아올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때 “예”라고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다.

결국 이 구절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지 결정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사랑, 기쁨, 평화를 주는 자리를 떠나보낼 것인가? 아니면 용기를 내어 그 잔치에 들어갈 것인가? 누가복음 14장 24절은 종교를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 초대에 응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빈자리는 언제나 채워진다. 다만, 그 자리에 내가 있을지는 나의 선택에 달렸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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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장 9절 칼럼n - 어둠 속에서도 빛을 지키는 힘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이 구절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위로의 메시지일 수 있지만, 종교적 배경을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때로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 구절은 그런 순간에도 내면의 선함과 정의가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을 전하며, 인간의 한계와 그 너머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먼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상징으로 읽힌다. 우리는 살면서 부당함을 겪거나, 약한 이들이 짓밟히는 모습을 볼 때 분노와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런 상황에서도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힘이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예를 들어, 역사 속에서 억압에 맞서 싸운 인물들-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혹은 이름 없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물리적 힘이 아닌 도덕적 신념으로 세상을 바꿨다. 그들의 발걸음은 흔들렸을지언정, 결국 보호받고 승리했다는 점에서 이 구절과 닿아 있다.

반면,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는 잘못된 길을 걷는 이들이 언젠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마주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종교적 심판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자연스러운 원리다.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이나 돈으로 약자를 억누르는 이들이 결국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금융 사기나 부패 스캔들로 몰락한 기업가들, 혹은 폭력을 일삼다 고립된 이들의 이야기는 이 구절이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어둠은 그들의 행위를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그들을 지켜주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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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라는 결론이다. 이는 물리적 힘이나 외적인 조건이 삶의 승패를 결정짓지 않는다는 강렬한 선언이다. 우리는 종종 성공을 돈, 지위, 혹은 체력으로만 측정하려 하지만, 진정한 힘은 내면에서 나온다. 병상에 누워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환자, 가난 속에서도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 혹은 재난 속에서 이웃을 돕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진리를 증명한다. 그들은 근육이나 무기가 아니라 마음의 강인함으로 이겨낸다.

이 구절은 신앙이 없어도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보편적으로 갈망하는 희망과 정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불공평해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선한 이들이 흔들리지 않고, 악이 영원히 승리하지 않으며, 진짜 힘은 내면에서 나온다는 믿음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선명해진다. 이 단순하면서도 깊은 진리는 오늘도 우리 발걸음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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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편 7절 칼럼n - 의로움과 정직이 가져오는 빛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편 11편 7절의 말씀은 단순한 종교적 구절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이 구절은 의로움과 정직이라는 가치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이 말씀은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도덕적 나침반과 연결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마음을 일깨운다.

의로움은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을 넘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공정하게 행동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예를 들어, 길에서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행위는 작은 의로움의 실천이다. 이런 행동은 종교적 믿음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선하다고 느끼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때로 불공정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의로운 선택은 그 속에서 빛을 발한다. 시편의 이 구절은 의로움이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게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듯하다.

정직은 의로움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직한 사람은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실수를 감추거나, 더 나아 보이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정직은 결국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친구에게 실수를 솔직히 고백했을 때 오히려 신뢰가 깊어졌던 경험, 혹은 직장에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함으로써 오해를 풀었던 순간을 떠올려 보자. 정직은 관계를 단단히 하고, 마음에 평온을 준다.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라는 표현은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더 넓게는 정직함으로 자신과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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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약속하는 보상에 있다. 의로움과 정직을 실천하는 이들은 ‘그의 얼굴을 본다’는 희망을 품는다. 이는 신앙적인 맥락에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하지만, 일상에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과의 진실한 연결을 경험하는 순간들로 해석할 수 있다. 누군가를 돕고 나서 느끼는 뿌듯함,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화해했을 때의 따뜻함—이런 순간들이 바로 ‘얼굴을 보는’ 경험 아닐까.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런 감정은 삶의 의미를 더해준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의로움과 정직은 때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으로 보인다. 경쟁이 치열하고, 성공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듯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런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상기시킨다. 의로움과 정직은 단기적인 이익을 넘어, 우리 삶에 깊은 울림을 준다. 타인에게 신뢰를 주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힘은 어떤 물질적 보상보다 강력하다.

결국, 시편 11장 7절은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얼마나 의롭게,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완벽할 필요는 없다. 매일 작은 선택 속에서 조금 더 나은 방향을 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다. 이 말씀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선한 삶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의로움과 정직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초석이다. 그러니 오늘, 단 한 번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보자.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그의 얼굴’을 조금씩 보게 될 것이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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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7장 19절 칼럼n - 맹세와 배신: 인간의 약속에 담긴 무게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약속을 주고받는다. 친구와의 사소한 약속부터 가족 간의 깊은 맹세, 심지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조용한 결심까지. 약속은 인간 관계와 삶의 기본 틀을 이루는 요소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때로는 고의로 약속을 깨며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신뢰를 잃는다. 이 구절은 이런 배신의 무게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이 말씀은 비단 종교적 맥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약속과 배신, 그리고 그 결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다.

약속은 신뢰의 상징이다. 누군가와 약속을 나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며, 미래를 함께 구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결혼 서약은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의 정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이혼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는 사랑과 헌신의 맹세가 깨지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음을 뜻한다. 약속이 깨질 때, 남는 것은 상실감과 배신감이다. 에스겔의 구절에서 언급된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 인간 사이의 신뢰가 무너질 때 느끼는 깊은 실망을 떠올리게 한다.

배신은 왜 그렇게 아픈가? 그것은 우리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비밀을 누설하거나, 동료가 약속한 도움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심리학적으로 배신은 신뢰가 깨진 결과로 감정적 상처를 남기며, 때로는 신체적 스트레스로 이어지기도 한다. 에스겔의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라는 말은 배신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배신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의 배신은 경력의 몰락으로, 가정에서의 배신은 관계의 파탄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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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구절은 단순히 책임과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맹세와 언약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약속을 지키는 삶은 어렵지만, 그만큼 가치 있다. 작은 약속이라도 지킬 때마다 우리는 신뢰를 쌓고, 관계를 단단히 만든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아이에게 "널 사랑해"라고 말하며 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부모는 아이에게 안전감을 준다. 반대로,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안을 심어준다. 에스겔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네가 한 말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느냐?"

현대 사회는 약속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고 있다. 계약은 법으로 강제되지만, 마음에서 우러난 약속은 쉽게 잊힌다.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며 응원하겠다고 한 말이 다음 날이면 잊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에스겔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약속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걸고 하는 맹세다. 그것을 어길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준다. 배신의 대가는 외부에서 오는 처벌뿐 아니라 내면의 혼란과 죄책감이기도 하다.

결국, 이 구절은 우리 모두에게 공감과 성찰을 요구한다. 종교를 떠나, 약속과 배신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삶의 일부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약속을 지키고, 얼마나 쉽게 배신했는가? 그 선택의 무게를 다시 생각해보며, 오늘이라도 한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켜보는 건 어떨까. 그것이 신과의 맹세든, 사람과의 약속이든, 결국 그 가치는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말처럼, 약속은 우리의 삶 그 자체와 맞닿아 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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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장 26절 칼럼n - 의지할 곳이 있는 삶의 힘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삶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길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어떤 날은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며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지만, 또 어떤 날은 폭풍우처럼 거센 시련이 몰아쳐 발걸음을 흔들리게 한다. 이런 순간, 우리는 어디에 기대야 할까? 성경 구절인 잠언 3장 26절은 이렇게 말한다.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이 짧은 문장은 종교적 믿음을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하며, 그 힘이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준다는 메시지다.

의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지탱을 넘어 마음의 안정과 방향을 찾는 행위다. 누군가는 가족에게, 또 다른 누군가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며 힘을 얻는다. 혹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신념이나 자연의 섭리에서 평화를 발견하기도 한다. 잠언의 이 구절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본질은 우리가 각자 신뢰할 수 있는 존재나 가치를 통해 삶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점에 있다. 당신에게 그 의지처가 무엇이든, 그것이 있기에 우리는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과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다. 직장에서의 압박, 인간관계의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은 우리의 발을 걸리게 하는 돌부리와 같다. 예를 들어, 한 직장인은 매일 야근을 반복하며 지쳐갈 때,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의 미소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산책 중 마주한 바람 소리와 나무의 흔들림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처럼 의지할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것이 우리를 지탱한다는 점은 변함없다. 잠언의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는 약속은, 우리가 신뢰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어떤 험난한 길도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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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또한 우리에게 능동적인 태도를 제안한다. 의지한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힘을 찾고 붙잡으려는 노력이다. 어려움 속에서 주저앉기보다, 내가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돌아보고 그것을 단단히 붙잡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번쯤 생각해보자.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게 사람이라면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자연이나 내면의 가치라면 그것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결국, 잠언 3장 26절은 삶의 보편적인 진리를 담은 말이다. 우리는 모두 넘어질 수 있는 존재지만, 동시에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다. 그 힘은 우리가 의지하는 곳에서 온다. 종교적인 믿음이든, 인간관계든, 혹은 스스로 쌓아온 신념이든, 그것이 우리를 걸어가게 한다. 오늘, 당신의 발걸음이 흔들릴 때, 잠시 멈춰 무엇이 당신을 지켜주는지 떠올려보길 바란다. 그곳에 기대어 다시 한 걸음 내디디면, 걸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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