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침묵 끝에 엘리사벳의 태가 열리고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모든 것이 끝난 때였으나 하나님의 때는 달랐습니다. 성령께서는 기다림에 지친 성도에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약속을 잊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웃과 친족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긍휼은 헬라어로 엘레오스(ἔλεος)이며,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뜻합니다. 이 아이는 공로로 얻은 상이 아니라 긍휼로 받은 선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그 긍휼 위에 놓여 있습니다.
팔 일째 되는 할례의 날, 사람들은 관례를 따라 아버지의 이름 사가랴로 부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요한이라" 하였고, 친척 중에 그런 이름이 없다는 반발이 뒤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은 익숙한 길을 벗어나기에 언제나 낯설고 외롭습니다. 성령께서는 전통과 주변의 시선보다 주님의 말씀에 먼저 귀를 기울이라고 부르십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요하난(יוֹחָנָן)으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사가랴가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불신으로 닫혔던 입이 순종 앞에서 열렸습니다. 성령께서는 순종하는 입술에서 가장 먼저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이웃들은 두려워하였고 이 소문은 온 유대 산골에 퍼졌습니다. 듣는 자가 다 마음에 두고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될까" 하며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한 가정 안에 머물지 않고 마을 전체를 흔듭니다. 말씀대로 사는 성도의 삶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묻게 만드는 가장 조용한 증언입니다.
본문은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로 끝납니다. 손은 헬라어로 케이르(χείρ)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돌보심을 가리킵니다. 한 아이의 앞날을 지키는 것은 환경이나 계획이 아니라 주의 손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자녀와 가정과 교회를 그 손에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게 느껴질 때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2. 익숙한 관례와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힐 때, 나는 어느 쪽을 먼저 따랐습니까? 3. 나의 입술은 순종 이후에 찬송으로 열리고 있습니까, 아직 불신으로 닫혀 있습니까?
기도합시다: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 기다림의 시간에도 저희를 잊지 않으시는 은혜를 믿고 말씀 앞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저희 입술이 찬송으로 열리고 저희 가정 위에 주의 손이 함께하심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옵시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람들은 흔히 가진 것이 많을 때 노래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통장이 넉넉하고 집안이 평안해야 웃음도 나온다고 믿는다. 그런데 성경에는 가진 것 없는 시골 처녀가 부른 노래가 이천 년 넘게 불려 오고 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노래, 곧 '마그니피캇'이다.
마리아의 형편을 보자. 결혼 전에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처지였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노래할 이유보다 두려워할 이유가 훨씬 많았다. 그런데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찬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갈뤼네이(μεγαλύνει)'는 '크게 한다'는 뜻이다. 마리아는 걱정을 키우지 않고 하나님을 크게 모셨다.
마리아는 스스로를 낮고 보잘것없는 종이라 부른다. 헬라어 '타페이노시스(ταπείνωσις)'는 낮아진 처지를 뜻하는 말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바로 그 낮은 자리를 돌아보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력서나 배경을 보고 사람을 고르시지 않는다. 내세울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손을 가장 단단히 붙잡는다.
노래는 개인의 기쁨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을 향해 번져 간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를 내리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며, 주린 자를 배불리시고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신다. '공수'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누스(κενούς)'는 텅 비었다는 뜻이다. 부자를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하나님이 채우실 자리가 없다는 경고다.
이 노래의 바탕에는 긍휼이 있다. 헬라어 '엘레오스(ἔλεος)'는 히브리어 '헤세드(חֶסֶד)', 곧 변하지 않는 사랑과 신실함과 맞닿아 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다고 노래한다. 우리의 형편은 자주 바뀌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이 노래는 상황이 아니라 신실하신 분 때문에 부를 수 있다.
지금 삶이 팍팍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손에 쥔 것이 없어 부끄러운 성도도 있고, 쥔 것을 잃을까 불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둘 모두에게 같은 초대장을 보낸다. 손을 펴고 하나님 앞에 서라는 초대다. 빈손이어야 받을 수 있고, 펴야 채워진다. 오늘은 걱정을 키우는 대신 하나님을 크게 모시는 노래를 불러 보자.
칼럼에 대한 질문: 1. 마리아는 두렵고 불안한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을 크게 모셨다. 지금 나의 마음에서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것은 걱정인가, 하나님인가? 2. 하나님이 낮은 자리를 돌아보신다는 말씀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되는가? 3. 자기 것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오늘 내 삶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내려놓는 일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래는 마음이 차오를 때 흘러나옵니다. 어린 마리아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후대 교회는 이 노래를 '마리아의 찬가'라 불러 왔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노래합니다. 오늘 이 노래를 통해, 낮은 자를 돌보시고 높이시며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만나기를 바랍니다.
1. 비천함을 돌보신 하나님 (46-50절)
강해: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46-47절)이라고 노래합니다. '찬양하다'는 헬라어 메갈뤼네이(μεγαλύνει)로 '크게 높이다'라는 뜻이고, '기뻐하였다'는 에갈리아센(ἠγαλλίασεν)으로 '뛰놀며 기뻐하다'라는 뜻입니다. 기쁨의 이유는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48절)입니다. '비천함'은 타페이노신(ταπείνωσιν)으로 낮고 보잘것없는 처지를 가리키며, '돌보셨다'는 에페블렉센(ἐπέβλεψεν)으로 '눈길을 두어 살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시골 처녀에게 눈길을 두신 분입니다.
해설: 한나는 아들을 얻고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삼상 2:1)라고 노래했고, 하박국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라고 고백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이 오래된 신앙의 노래를 잇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보소서 나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순종했습니다. 이 낮은 마음 위에 하나님의 큰 일이 임했습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49-50절)에서 '긍휼'은 엘레오스(ἔλεος)인데, 구약의 헤세드(חֶסֶד), 곧 언약에 근거한 변치 않는 사랑과 통하는 말입니다.
적용: 하나님은 크고 화려한 자리만 보지 않으시고 낮고 작은 자리를 살피십니다. 내가 보잘것없다고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 먼저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환경이 바뀌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보신 하나님을 알기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받은 작은 은혜 하나를 찾아 입술로 고백하며 한 주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2. 뒤집으시는 하나님 (51-53절)
강해: 마리아는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51-52절)라고 노래합니다. 이 동사들은 헬라어 부정과거(아오리스트)로 되어 있어, 아직 오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확신하며 선포합니다. '흩으셨다'는 디에스코르피센(διεσκόρπισεν)으로 곡식을 흩뿌리듯 무너뜨리셨다는 뜻이고, '힘을 보이사'는 에포이에센 크라토스(ἐποίησεν κράτος)로 능력을 행하셨다는 표현입니다. 노래는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셨고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53절)로 이어집니다.
해설: 이 노래는 한나의 노래와 맞닿아 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7). 이 뒤집으심은 단순한 신분의 역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약 4:6)고 하였고, 예수님도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훗날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 6:20)라고 선포하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미리 들려줍니다. 그 질서는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화: 한 시골 작은 교회에 몸이 불편한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 가시던 그분은 늘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어느 해 겨울, 난방이 고장 나 예배당이 얼어붙자 할머니는 말없이 봉투 하나를 내려놓으셨습니다. 그 안에는 오랜 세월 모아 둔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이 가득했습니다. 성도들은 그 작은 봉투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날 예배당은 따뜻해졌고, 더 따뜻해진 것은 성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은 그 할머니를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헌신을 분명히 보고 계셨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드린 작은 정성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사람은 스스로 높아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위와 재물과 지식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나누고 섬기는 도구입니다. 이번 주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낮은 자리에서 섬길 일 하나를 정해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모든 수고를 기억하십니다.
3. 약속을 기억하신 하나님 (54-56절)
강해: 마리아는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그 긍휼을 기억하시고"(54절)라고 노래합니다. '도우사'는 안텔라베토(ἀντελάβετο)로 '붙들어 도와주시다'라는 뜻이고, '기억하시고'는 므네스데나이(μνησθῆναι)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떠올리시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신 대로 행동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어 자카르(זָכַר)도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55절은 "우리 조상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라고 노래하며, 구원이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힙니다.
해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오랜 침묵 속에 있었으나 잊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라고 증언합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계신 아기가 바로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사가랴도 뒤이어 "그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시니"(눅 1:72)라고 노래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간 것(56절)은, 찬양 뒤에도 평범한 일상이 이어짐을 보여 줍니다. 약속은 이루어지지만 믿음의 길은 일상 속에서 계속됩니다.
적용: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어 보여도 잊히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 낙심한 성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또한 마리아처럼 찬양의 자리에서 일상으로 돌아가 말씀대로 살아가십시오. 오늘 붙들고 있는 약속의 말씀 한 구절을 정해 매일 소리 내어 읽으시기 바랍니다.
맺는말[Conclusion]:
마리아의 노래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낮은 자를 돌보셨기에 기뻐하였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눈길을 발견할 때, 우리의 입술에서도 참된 찬양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분입니다. 이 질서는 세상의 방식과 다르지만 변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를 좇느라 지친 성도가 있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주님이 베푸시는 참된 평안과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아기 예수님으로 이루어졌고, 그 구원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직 광야 같아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마리아와 함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에 대한 질문:
1. 지금 내가 서 있는 낮고 작은 자리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돌보심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찬양으로 고백하겠습니까? 2. 내 삶에서 하나님 앞에 낮아져야 할 교만이나 자랑은 무엇이며, 이번 주에 실천할 수 있는 섬김은 무엇입니까? 3.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지금도 붙들고 있는 말씀은 무엇이며, 그 말씀을 어떻게 일상에서 지켜 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