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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2장 50절 칼럼 - 그러므로 노래하리라

"여호와여 그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살다 보면 노래가 도저히 나오지 않는 날이 있다. 쫓기듯 달려온 하루 끝에서 한숨만 나오고, 마음에 드리운 먹구름이 걷힐 기미가 없을 때가 있다. 다윗도 그런 세월을 살았다.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떠돌았고, 왕이 된 뒤에도 끊임없이 칼날 앞에 서야 했다. 사무엘하 22장은 그런 다윗이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짐을 받은 날에 하나님께 올린 긴 노래다.

그런데 50절을 읽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다. 다윗이 노래하겠다고 한 장소가 '이방 나라 중'이라는 점이다. 히브리어로 '고임(גּוֹיִם)'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을 가리킨다. 교회 안에서 편안하게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믿음이 낯선 사람들 한복판에서 부르겠다는 다짐이다. 그의 감사는 골방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려 한다.

노래의 출발점은 '그러므로'라는 짧은 접속사다. 히브리어 '알켄(עַל־כֵּן)'은 앞에 있었던 일이 뒤의 결단을 낳는다는 뜻이다. 다윗이 노래하는 까닭은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 주신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감사는 감정에서 나오지 않고 기억에서 나온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나를 붙드신 손이 보인다. 그 기억이 있는 사람은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 앞에서도 입을 열 수 있다.

이어지는 두 동사도 눈여겨볼 만하다. '오데카(אוֹדְךָ)'는 '내가 주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고백하겠다'는 말이고, '아잠메르(אֲזַמֵּר)'는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겠다'는 말이다. 하나는 입술의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가락이 있는 찬양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로 분명히 드러내고, 그 기쁨을 노래로 흘려보내겠다는 것이다. 믿음은 마음속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말과 노래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신약에서 바울은 로마서 15장 9절에서 이 구절을 이방인의 구원과 연결해 인용한다. 헬라어 '엑소몰로게소마이(ἐξομολογήσομαι)'와 '프살로(ψαλῶ)'가 그 자리에서 다윗의 두 동사를 이어받는다. 이스라엘 왕의 노래가 마침내 모든 민족이 함께 부르는 찬송이 된다는 선언이다. 다윗이 부른 노래는 그의 시대에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방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니 성도의 노래가 울려야 할 자리도 분명하다. 교회당 안만이 아니라 일터와 학교, 시장과 이웃 사이, 믿지 않는 이들과 부대끼며 사는 그 자리가 우리의 '이방 나라 중'이다. 거창한 무대가 아니어도 좋다. 어려운 날에도 감사를 잃지 않는 표정, 하나님을 향한 조용한 고백이면 충분하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은혜가 있다면, 그 '그러므로'를 붙여 작은 노래 하나를 시작해 보자.

칼럼에 대한 질문:

1. 요즘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 가운데 '그러므로 노래하겠다'고 고백할 만한 기억은 무엇인가?
2. 내가 사는 삶의 자리 가운데 신앙의 노래가 가장 필요한 '이방 나라 중'은 어디인가?
3. 감정이 따라 주지 않는 날에도 감사를 고백하려면 나는 어떤 습관을 붙들어야 하는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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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7편 1절 강해 - 찬양의 세 가지 이유

제목: 찬양의 세 가지 이유
구절: 시편 147편 1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선하며 찬송하는 것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할렐루야"로 시작합니다.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이 무너진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던 때의 노래로 보입니다. 폐허 위에서도 찬양이 먼저 터져 나왔습니다. 시인은 찬양할 형편이 되어서 찬양하라고 하지 않고, 찬양이 선하고 아름답고 마땅하기 때문에 찬양하라고 합니다. 오늘 이 한 절 속에서 찬양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찬양은 선합니다 (1절 상반절)

강해: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선하며" 시인은 "할렐루야"라고 외칩니다. 히브리어 '할렐루-야(הַלְלוּ יָהּ)'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선하다'로 옮긴 말은 '토브(טוֹב)'이고, 성경에서 '좋다', '선하다'를 뜻하는 아주 기본적인 낱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바로 그 단어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고, 찬양하는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시인은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멀리 계신 신이 아니라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해설:
시편 92편 1절은 "지극히 높으신 이여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 좋사오며"라고 노래합니다. 같은 '토브'가 쓰였습니다. 찬양은 기분 좋을 때 하는 장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에 맞는 선한 일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 우리 영혼은 제자리를 찾습니다. 불평이 가득하던 입술도 찬양을 시작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적용:
이번 주에 감사할 일이 없다고 느껴지더라도 먼저 입을 열어 찬양해 보시기 바랍니다. 찬양은 상황이 좋아진 뒤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놓는 선한 시작입니다. 새찬송가 한 곡을 정해 아침마다 불러 보십시오.

2. 찬양은 아름답습니다 (1절 중반절)

강해:
"찬송하는 것이 아름답고" '아름답다'는 히브리어로 '나임(נָעִים)'이며 '즐겁다', '사랑스럽다', '향기롭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듣는 이의 마음도 부드럽게 하는 아름다움입니다. 여기서 '찬송'으로 옮긴 '자므라(זַמְּרָה)'는 악기와 함께 노래한다는 뜻의 낱말에서 나왔습니다. 입술만이 아니라 목소리와 악기, 온 삶이 함께 드리는 노래입니다. 서툰 노래도 하나님께는 아름답습니다. 그 노래에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해설:
시편 135편 3절은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찬양이 아름다운 까닭은 찬양받으실 분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분을 바라보는 영혼은 그 아름다움을 닮아 갑니다. 찬양을 드리는 사람의 얼굴과 말과 삶에 은은한 향기가 배어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화:
어느 시골 교회에 목소리가 거칠고 음정이 맞지 않는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예배 때마다 누구보다 크게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젊은 성도들이 은근히 부담스러워하자, 하루는 담임 목사님이 조용히 권사님께 이유를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젊어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자식 셋을 혼자 키웠습니다. 울 힘도 없던 밤마다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저를 붙들어 주셨는데, 어떻게 작게 부르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뒤 교회는 달라졌습니다. 그 거친 목소리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임을 모두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용:
다른 사람 앞에서 노래 실력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목소리가 아니라 마음을 들으십니다. 특별히 가정과 일터에서 찬양이 흘러나오게 해 보십시오. 말다툼이 있던 자리에도 찬송 한 소절이 평화를 가져옵니다.

3. 찬양은 마땅합니다 (1절 하반절)

강해:
"찬송하는 것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마땅하다'는 히브리어 '나와(נָאוָה)'로 '어울린다',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면 찬양은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 시편의 뒷부분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상한 마음을 고치시며, 별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땅에 비를 내리신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시고 흩어진 자를 모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찬양을 드리는 것은 의무이기 전에 은혜를 아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응답입니다.

해설:
시편 33편 1절은 "의인이여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찬양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도 같은 고백이 이어집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은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성도에게 찬양은 마땅한 보답입니다.

적용:
찬양을 감정에 맡기지 말고 믿음의 습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기분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힘들고 지칠 때도 "우리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마땅히 드리는 찬양이 쌓일 때 우리 신앙은 단단해집니다.

맺는말[Conclusion]:

오늘 우리는 시편 147편 1절에서 찬양해야 할 세 가지 이유를 보았습니다. 찬양은 선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 영혼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삶에 향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마땅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신 은혜가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폐허 위에서 "할렐루야"를 외쳤던 옛 백성처럼, 우리도 형편을 넘어서 찬양을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자리에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앞에서도 찬양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먼저 바라보게 합니다. 찬양하는 입술에 하나님은 위로와 새 힘으로 응답하십니다.

이제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한 주간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침에는 감사의 찬송으로 문을 열고, 저녁에는 찬송으로 하루를 닫으십시오. 가정과 일터가 찬양의 자리가 되고,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노래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관련 질문:

1. 요즘 나의 입술에는 감사와 찬양이 더 많습니까, 불평과 걱정이 더 많습니까? 찬양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2. 찬양이 '선하고 아름답고 마땅하다'는 세 가지 고백 가운데, 지금 내 신앙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 이번 한 주간 가정이나 일터에서 찬양을 실천할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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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11절 묵상 - 버린 돌이 머릿돌로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공회 앞에 섰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선 일로 심문을 받는 자리였습니다. 성령께서는 두려워 떨던 어부의 입을 열어 예수님을 담대히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성도가 두려움 앞에서도 진리를 말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로부터 옵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에벤 마아수 하보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의 헬라어 '엑수데네데이스'는 단순히 치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업신여김과 멸시를 당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무관심 속에 밀려나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경멸을 온전히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돌을 고르는 건축자들은 성전을 지키고 말씀을 가르치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랜 신앙의 경력도 내 기준으로 주님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도리어 주님을 버리는 자리에 서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내 생각의 잣대를 내려놓고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버려진 돌을 '께팔렌 고니아스', 곧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우셨습니다. 머릿돌은 두 벽을 맞물려 건물 전체를 붙들고 방향을 정하는 돌입니다.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은 부활로 교회의 터와 중심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거절은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막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12절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라고 선언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이 아니라 버림받으셨다가 높임 받으신 그분께만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훗날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말합니다. 머릿돌 되신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성도 또한 쓰임 받는 산 돌이 됩니다.

세상에서 쓸모없다고 밀려났다고 느끼는 성도가 있다면, 성령께서 오늘 이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버림받으신 주님께서 가장 귀한 자리에 서셨듯이, 주님 안에서 우리의 눈물과 아픔도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마음의 벽을 머릿돌이신 예수님께 맞추어 다시 세워 나가는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혹시 내 기준과 경험으로 주님의 뜻을 판단하며 주님을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버려진 느낌을 받았을 때, 머릿돌 되신 예수님은 내게 어떤 위로가 됩니까?
3. 내 삶과 가정과 교회의 중심에 예수님을 머릿돌로 세우기 위해 이번 주에 구체적으로 바꿀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기도합시다:

버림받으시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주님,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를 오직 주님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고 성령으로 담대히 증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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