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고들 하지만, 정작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이가 많다. 한 식탁에 둘러앉아서도 각자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옆집 사람의 얼굴은 몰라도 멀리 있는 낯선 이의 소식은 훤하다. 연결되어 있으나 외로운 시대를 사는 셈이다. 이런 때에 삼천 년 전 한 시인의 노래가 조용히 우리 곁에 와 앉는다.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불리던 순례자의 노래 가운데 하나다. 먼 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부르던 노래였다. 시인은 "보라"로 시작한다. 히브리어 '힌네'(הִנֵּה)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라는 초대의 말이다. 이 노래는 이론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한 장면을 함께 보자고 말을 건넨다.
이어지는 "선하고 아름다운고"는 '토브'(טוֹב)와 '나임'(נָעִים)이라는 두 단어다. 토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고 "좋았더라" 하실 때 쓰인 바로 그 단어다. 나임은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즐거움을 뜻한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이 사람에게도 기쁨이 된다는 말이다. 형제가 함께 사는 일은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만나는 자리다.
"연합하여 동거함"은 '셰벳 아힘 감-야하드'(שֶׁבֶת אַחִים גַּם־יָחַד)로, 형제들이 '함께 함께' 앉아 있다는 말이다. 같은 지붕 아래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마주 앉아 삶을 나누는 모습이다. 연합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성격도 생각도 다른 사람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연합이다. 의견이 갈리는 순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 연합을 지켜 낸다.
신약도 같은 마음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권한다. 여기서 '하나 됨'은 헬라어 '헤노테스'(ἑνότης)인데, 우리가 새로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이미 주신 것을 지키라는 뜻이다. 성도의 연합은 애써 쌓아 올린 탑이 아니라 선물로 받은 집이다. 그러니 우리의 몫은 그 집의 문을 닫아걸지 않는 일이다.
오늘 우리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따뜻한 밥 한 끼의 식탁인지도 모른다. 먼저 전화를 걸고, 먼저 자리를 내어 주고, 생각이 다른 이의 말을 끝까지 앉아서 들어 보자. 그 자리에서 시인이 노래한 선함과 아름다움이 조용히 피어날 것이다. 형제가 함께 앉은 그 자리가 이미 작은 성전의 입구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연결은 많은데 외롭다고 느끼는 나에게, 한 식탁에 마주 앉을 사람은 누구인가? 2.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곁에 끝까지 앉아 있기 위해 오늘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3. 연합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면, 내 가정과 공동체에서 닫힌 문은 어디인가?
본문 말씀 (눅 1:1~4, 개역개정)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각하 데오빌로에게 순서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 우리 교회는 누가복음을 한 장 한 장 함께 읽어 나가는 강해설교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한 권의 편지를 받았을 때, 우리는 대개 두 가지를 먼저 확인합니다. 누가 보냈는가, 그리고 왜 보냈는가. 그것을 알고 나면 그 편지의 한 줄 한 줄이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을 본격적으로 읽어 내려가기 전에, 오늘 우리는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도대체 어떤 책인가?”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스물일곱 권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책이며, 누가복음-사도행전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두 권짜리 작품의 전반부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 책의 저자는 서두에서 자신이 왜, 어떻게 이 책을 썼는지를 친절하게 밝혀 줍니다. 오늘 본문 1장 1절에서 4절, 이 짧은 네 절 속에 누가복음 전체의 성격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서문을 창문 삼아, 그리고 누가복음 전체를 조망하며,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누가복음은 “확실한 증거” 위에 세워진 신뢰할 수 있는 책입니다 누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1:2),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1:3) 기록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지어낸 이야기, 전설, 신화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1) 누가는 누구입니까 누가복음의 저자는 사도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던 의사 누가입니다. 바울은 그를 이렇게 부릅니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골 4:14)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11) 사도행전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들(행 16:10~17; 20:5~21:18; 27:1~28:16)은 저자가 바울의 선교 여행에 직접 동행했던 목격자였음을 보여 줍니다. 골로새서 4장의 구분을 따르면 누가는 이방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그는 신약성경 저자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이 됩니다. 그가 쓴 복음서가 유독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2) 언제, 왜 기록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복음을 전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행 28:30~31). 바울의 순교나 로마의 대화재 박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같은 그 이후의 중대한 사건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설명은,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주후 60년대 초에 사도행전이 기록되었고, 그보다 앞서 누가복음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사건이 벌어진 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만들어진 전설이 아니라, 목격자들이 여전히 살아 있던 시대에, 그들의 증언을 근거로 기록된 책입니다.
3) 성령의 영감과 인간의 수고 누가는 자신이 자료를 모으고, 조사하고, 순서대로 정리했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이라는 고백과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영감은 인간 저자의 인격과 성실한 연구 과정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온전히 사용하셔서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내십니다.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사람의 손으로 조사되었고,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된 말씀입니다. 결국 1장 4절의 목적이 이것입니다.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데오빌로는 이미 복음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그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믿고 있는 바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서 있음을 확증해 주려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책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막연한 감정이나 전통이 아니라, 목격자들의 증언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역사적 사실 위에 서 있습니다.
둘째, 누가복음은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책입니다 누가가 이 책을 헌정한 대상은 “각하 데오빌로”였습니다. 이 칭호는 사도행전에서 로마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에게 쓰인 것과 같은 정중한 존칭으로(행 23:26; 24:3; 26:25), 데오빌로가 상당한 지위를 가진 실존 인물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방 세계의 독자를 향해 쓰인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운 보편성을 선포합니다.
1)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 마태복음의 족보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유대적 정체성을 강조한다면,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 그리고 하나님께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기록합니다(3:23~38).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의 구주이심을 이 계보 하나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2) 이방을 비추는 빛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2:30~32) 세례 요한을 소개하며 누가는 다시 한 번 못박습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3:6)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명하십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24:47) 서두의 시므온의 찬가에서 마지막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하나 된 목소리로 외칩니다. 구원은 어느 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족속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3) 소외된 자들, 그리고 위대한 반전 이 보편적 구원의 복음은 구체적인 얼굴을 가지고 누가복음 곳곳에 등장합니다. 가난한 자, 세리와 죄인, 사마리아인, 여성들,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유독 이 책에서 조명을 받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1:52~53) 이 “위대한 반전”의 노래는 평지설교의 축복과 화 선언(6:20~26), 큰 잔치의 비유(14:15~24), 부자와 나사로(16:19~31),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9~14)를 거쳐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념이 말하는 사회 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의 공로나 지위와 아무 상관 없이 값없이 주어진다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오늘 낮은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더없이 따뜻한 복음서입니다.
셋째,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거하는 책입니다 결국 이 책의 중심은 사람도, 사건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누가는 여러 각도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1) 구주이시며 인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구주”라는 칭호는 공관복음 가운데 누가복음에서만 명시적으로 쓰입니다(2:11). 이는 로마 황제에게 붙여지던 “구원자”라는 칭호와 의도적으로 대비되는 선언으로, 참된 구원과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또한 다니엘 7장의 배경을 지닌 “인자”로서 고난받는 종이자 영광 중에 오실 심판주이시며, 수태고지에서 세례와 변화산과 십자가 아래 백부장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됩니다. 동시에 다윗 언약을 성취하시는 메시아이시며,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을 잇는 위대한 선지자이십니다.
2) 참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누가는 예수님의 인성을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생생하게 그려 냅니다. 지혜와 키가 자라가시는 소년 예수(2:40, 52),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 흘리시는 모습(19:41), 병자를 향한 연민(7:13), 그리고 광야에서 실제로 시험받으신 사건(4:1~13). 이는 니케아·칼케돈 신조가 고백하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풍성한 성경적 증거입니다.
3) 기도의 복음서, 성령의 복음서, 기쁨의 복음서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 밤새도록, 변화산에서, 겟세마네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까지 끊임없이 기도하십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성령과 함께 시작하여(1:35, 3:22, 4:1, 4:14, 4:18) 성령과 함께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쁨”의 노래로 가득합니다. 수태고지의 기쁨(1:14), 목자들에게 전해진 큰 기쁨의 좋은 소식(2:10), 잃은 자를 찾은 기쁨(15장), 그리고 마지막 장면, 승천하신 주님을 뒤로하고 제자들이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면(24:52~53)으로 이 복음서는 막을 내립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결국 기도로 시작하여 찬양과 기쁨으로 흘러넘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성취를 그리고, 그 후편인 사도행전은 성령을 통해 그 구원이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확산되어 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렇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도 바로 그 확산의 이야기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맺는 말: 누가복음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확실한 증거 위에 세워진 책이며, 어느 한 민족이 아니라 만민을 향해 열려 있는 구원의 책이며, 그 모든 페이지를 통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책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책을 한 장 한 장 함께 걸어가며, 데오빌로처럼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바의 확실함을 더욱 굳게 세워 갈 것입니다. 그리고 혹 아직 이 구주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첫 장의 초대가 바로 그분을 향한 것임을 믿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오늘도 이 말씀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확실한 증거 위에 세워진 말씀을 우리 손에 들려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말씀이 만민을 향한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다시 확증하게 하시고, 이제 시작하는 누가복음 강해의 여정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굳게 서게 하시고, 아직 주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복음이 능력 있게 전해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레미야애가는 무너진 예루살렘 앞에서 우는 눈물의 책입니다. 성전은 불타고 백성은 끌려갔으며, 3장의 시인은 자신이 고통의 매를 맞은 사람이라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그 폐허 한가운데에서 시인은 고개를 들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여기서 '새롭다'로 옮겨진 히브리어 '하다쉼'(חֲדָשִׁים)은 낡은 것이 새로워진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어제의 은혜를 오늘 다시 꺼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마다 새 은혜를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아침마다'(라베코림) 하나님의 자비는 어김없이 먼저 도착합니다.
'성실'은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로,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다는 뜻의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실은 우리의 형편에 따라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바로 앞 22절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인자(헤세드)와 긍휼(라하밈)이 곧 이 성실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상황이 나아진 뒤에 이 고백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성이 여전히 폐허인데도 고백했습니다. 믿음은 좋아진 환경을 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21절은 "내가 이것을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옵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기로 결단할 때 소망이 시작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눈을 뜨신 것부터 새로운 은혜입니다. 어제의 실패와 눈물이 오늘의 몫을 정하지 못합니다. 걱정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마시고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하십시오. 오늘 필요한 은혜는 오늘 넉넉히 공급됩니다.
가정과 일터와 병상과 기도의 자리에서 지치신 성도님이 계십니까? 성령께서 오늘 이 말씀으로 속삭이십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도 너를 위해 새 은혜를 준비하였다." 이 약속을 붙들고 한 걸음만 내딛으십시오. 그 걸음 앞에 이미 주님의 성실이 먼저 와 있습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시인은 폐허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실을 고백했습니다. 지금 나의 삶에서 '아직 무너져 있는 자리'는 어디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성실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습니까? 2.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걱정이었습니까, 감사였습니까? 내일 아침에는 어떤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까? 3. 어제의 실패와 후회가 오늘의 소망을 가로막고 있다면,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향해 오늘 내딛을 한 걸음은 무엇입니까?
기도합시다: 아침마다 새 은혜로 찾아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지치고 낙심한 저희 마음에 주의 성실을 다시 기억하게 하시고 오늘 하루를 소망으로 걷게 하옵소서. 성령님, 날마다 새로운 은혜 안에서 담대히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구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