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역대상 16장 25절 칼럼 - 누가 진짜 위대한가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로다"

사람들은 저마다 위대해지고 싶어 한다. 더 높은 자리, 더 큰 성공, 더 많은 박수를 얻으려고 하루를 달린다. 그런데 막상 원하던 자리에 올라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가 붙잡은 위대함이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오랜 기다림 끝에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온 날의 찬양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지 않았다. 대신 백성 앞에서 "여호와는 위대하시니"라고 노래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선 사람이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다.

여기서 '위대하시니'로 옮긴 히브리어 '가돌(גָדוֹל)'은 크기와 무게를 함께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은 규모만 큰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무게중심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또 '극진히'에 해당하는 '므오드(מְאֹד)'는 '힘껏, 아주 많이'라는 뜻이다. 찬양은 남는 시간에 건네는 인사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는 일이다.

다윗은 이어서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이라고 말한다. '경외'에 해당하는 '노라(נוֹרָא)'는 두려울 만큼 존귀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모든 신은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낯설지만, 돈과 명예와 안정이 은근히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일은 지금도 흔하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은 무엇이 내 마음의 주인인지 날마다 다시 묻는 일이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은 오히려 자유로워진다. 위대해져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해낸 일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고, 남과 비교하며 초조해할 이유도 없다. 이미 위대하신 분이 나를 붙들고 계시니 우리는 비교의 경주에서 내려와 감사의 자리에 설 수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렇게 고백해 보자.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이 한 문장이 우리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눈물을 제자리에 놓아 줄 것이다. 성도의 참된 위대함은 큰 자리에 있는 데 있지 않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낮아져 마음껏 찬양하는 데 있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요즘 나는 무엇을 '위대한 것'으로 여기며 마음과 시간을 쏟고 있는가?
2. 하나님보다 앞서 내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다른 신'은 무엇인가?
3. 오늘 하루, 하나님을 '극진히' 찬양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한 가지는 무엇인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가운데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레위기의 마지막 장인 27장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서원과 헌물에 관한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다시 비추어 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해 제목: 온전히 드리는 삶
구절 범위: 레위기 27장 1-34절
핵심 구절: 레위기 27장 28절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가축이든지 밭이든지 무엇이든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것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온전히 바친 것은 모두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서론: 레위기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스물여섯 장 동안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배워왔습니다. 이제 27장은 그 모든 가르침을 매듭지으며 한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고백한 것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물질과 삶 전체는 과연 누구의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서원과 헌물에 관한 세부 규례를 통해, 우리 신앙 고백의 진실성과 우리 삶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동시에 비추어 보여 줍니다. 레위기를 마무리하는 이 말씀 앞에 함께 서 봅시다.

1. 서원은 값없이 하되, 값없이 갚을 수는 없습니다 (1-8절)

강해: 1절과 2절은 레위기 전체를 관통해 온 계시의 공식, 곧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로 다시 시작됩니다. 이는 서원 제도가 인간의 종교적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신적 규례임을 선언합니다. 3절부터 8절까지는 사람 자신을 서원할 때, 즉 자기 몸을 성전 봉사에 드리기 어려운 형편일 때 은전으로 대신하는 값을 나이와 성별에 따라 정해 줍니다. 그런데 8절은 이 도표의 진짜 의도를 밝혀 줍니다. 서원자가 가난하여 정한 값을 감당하지 못하면, 제사장이 그의 형편대로 값을 낮추어 정해 줍니다.

해설: 전도서 5장 4절부터 5절은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차라리 서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경고하여, 서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여자의 값이 남자보다 낮게 매겨진 것을 보고 성경이 여성을 열등하게 본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남녀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선언하며,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신분적 차이가 사라졌다고 가르칩니다.

적용: 우리가 세례와 입교, 결혼과 직분 임직에서 드린 서약은 결코 형식적인 말이 아닙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액수가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으로 받으시니, 8절의 빈자 조항은 고린도후서 8장 12절, 곧 있는 대로 하면 받으신다는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내가 하나님 앞에서 드린 말과 삶이 일치하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봅시다.

2. 드린 것을 되돌리려면 값을 더하여야 합니다 (9-15절)

강해: 9절부터 13절은 짐승으로 드린 서원을 다룹니다. 정결한 짐승으로 서원했다면 그것은 이미 여호와의 성물이 되었으므로 좋은 것으로도 나쁜 것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만일 바꾸면 원래 것과 바꾼 것이 모두 거룩하게 됩니다. 부정한 짐승이라면 제사장이 값을 정하고, 무르려면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합니다. 14절과 15절은 집을 성물로 드리는 경우에도 동일한 원리, 곧 제사장의 공정한 평가와 되무를 때의 오분의 일 가산을 적용합니다.

해설: 이 규정의 핵심은 '거룩의 전이성'입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진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해질 뿐 아니라, 그것과 바꾼 것까지 거룩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이 계산으로 하나님의 몫을 줄이려 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오히려 그 계산까지 뒤덮어 버립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과 19절은 우리를 대속하신 값이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고 말합니다.

예화: 어느 시골 교회에 밭 한 뙈기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 한쪽 모퉁이를 떼어 '주님의 밭'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나는 소출은 온전히 교회와 이웃을 위해 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몇 해 뒤 흉년이 들어 가족의 양식마저 부족해지자, 그는 그 밭을 다시 자기 몫으로 거두어들이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밤새 기도하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정말 어려운 것은 밭이 아니라, 내가 드린 것을 아직도 내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다음 날 아침 그는 오히려 그 밭의 경계를 조금 더 넓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좁은 밭에서 나는 소출이 이웃 마을의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통로가 되었고, 훗날 사람들은 그 밭을 '되돌리지 않은 밭'이라 부르며 오래도록 기억했습니다. 드린 것을 거두어들이고 싶은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이 참인지 시험받는 순간입니다.

적용: 헌금을 드린 뒤 마음이 아까워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내 신앙의 진실성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레위기의 오분의 일 가산이 인간의 신실함을 요구하는 장치였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요구를 완전한 사랑으로 채우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을 계산으로 줄이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 결단을 더욱 굳게 붙듭시다.

3. 밭도, 첫 새끼도, 이미 주의 것입니다 (16-29절)

강해: 16절부터 25절은 밭의 서원을 다룹니다. 값은 희년을 기준으로 산정되며, 희년 후에 드리면 남은 햇수만큼 값이 줄어듭니다. 기업의 밭을 팔았다가 무르지 않으면 희년에 완전히 여호와께 귀속되지만, 산 밭이라면 희년에 원주인에게 돌아가므로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 26절과 27절은 처음 난 것을 다룹니다. 소나 양의 첫 새끼는 이미 여호와의 것이므로 애초에 서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28절과 29절은 가장 엄중한 헤렘, 곧 온전히 바친 것을 다룹니다. 이것은 팔지도 무르지도 못하는 지극히 거룩한 것입니다.

해설: 이 모든 규정을 관통하는 신학은 레위기 25장 23절의 선언입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밭도, 처음 난 것도, 우리의 몸도 본래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시편 24편 1절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노래하며,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선언합니다.

적용: 내가 '내 것'이라 여기는 통장, 집, 시간, 재능 가운데 아직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못한 영역은 없습니까. 골로새서 1장 15절과 히브리서 1장 6절이 증언하듯, 히브리서 7장 27절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기를 드려 헤렘의 완성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이미 그분의 것임을 오늘 다시 고백합시다.

4. 십일조는 돌려드리는 예배입니다 (30-34절)

강해: 30절부터 33절은 십일조를 다룹니다. "땅의 십일조는... 다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이는 서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권 선언입니다. 가축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지나가는 열 번째 것을 무작위로 택하는 방식으로 정해졌으며, 좋고 나쁜 것을 사람이 골라내거나 바꾸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34절,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는 레위기 26장 46절과 더불어 레위기 전체를 마무리하는 이중 결어입니다.

해설: 십일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십일조 자체를 폐하지 않으시고, 그것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과 함께 행해져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가르쳐, 레위기의 자원하는 헌신의 원리가 신약에서 더 깊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적용: 십일조와 헌금을 의무의 계산으로 드리지 말고, 모든 소산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예배로 드립시다. 레위기는 규례로 끝나지만, 로마서 12장 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물질뿐 아니라 삶 전체가 그분께 돌려드리는 산 제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맺는말[Conclusion]:

레위기 27장은 단순히 서원과 헌물의 세부 규정이 아닙니다. 이는 레위기 전체가 가르쳐 온 거룩한 삶이 결국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마침표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집도, 밭도, 처음 난 것도, 소산의 십분의 일도, 모두 이미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 소유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이 모든 규례의 정점에는 헤렘, 곧 되돌릴 수 없는 온전한 헌신이 있습니다. 이 헤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히브리서 7장 27절이 말씀하듯, 그리스도는 단번에 자기를 드려 되돌릴 수 없는 완전한 헌신을 이루셨습니다. 은이나 금으로 대속하던 우리를, 그분은 자기 생명 전부로 값을 치르셨습니다.

레위기 1장에서 시작된 제사와 속죄, 정결과 거룩, 안식과 희년의 가르침은 이제 27장에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의 몸과 물질과 시간, 삶의 모든 영역이 이미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의 산 제물 된 삶은 이 레위기적 헌신의 신약적 완성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예배와 헌금과 결단이 형식에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드린 말과 서약, 아직 내 것으로 붙들고 있는 모든 소유를 다시 그분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몸과 물질과 시간이 본래 주님의 것임을 레위기 27장을 통해 다시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내 것이라 붙들고 있는 것들을 온전히 내려놓고, 헤렘의 은혜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산 제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말과 서약이 일치하는 신실한 성도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 4장 24절 묵상 - 우리를 위한 말씀

"또한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를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니라"

로마서 4장 24절은 한 문장 안에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 절에서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기록이 아브라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뒤, 그 말씀이 오늘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성경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성도에게 건네시는 성령의 편지입니다.

여기서 '여기심을 받다'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 로기조마이)는 장부에 기록하듯 셈하여 넣는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의 히브리어 하샤브(חָשַׁב, 하샤브)와 같은 흐름입니다. 내가 공로를 쌓아서 얻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 이름 앞에 의를 기록해 주신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보십시오.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아들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믿었고, 우리는 이미 일어난 부활의 사건 위에 서 있습니다. 헬라어 에게이란타(ἐγείραντα, 에게이란타)는 '일으키셨다'는 뜻으로, 무덤이 마지막이 아님을 증거합니다.

믿는다는 말의 히브리어 헤에민(הֶאֱמִין, 헤에민)은 '아멘'과 뿌리가 같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내 전부를 기대어 세운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감정의 고조나 지식의 동의에 머물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내 삶의 막막한 자리에서도 일하고 계심을 믿고 맡기는 신뢰입니다. 백 세가 된 아브라함의 몸과 사라의 닫힌 태 앞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니라"로 끝맺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짧은 한마디로 지금 말씀을 대하는 성도를 의로 여기심을 받은 자의 자리에 불러 세우십니다. 실패와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정죄하던 사람도, 지친 몸으로 예배의 자리에 앉은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은 우리가 만든 증명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 이 은혜 위에 서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부끄러운 과거를 붙들고 주저앉기보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살아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아직 열리지 않은 문 앞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 내딛으십시오. 그 믿음 위에 평안과 담대함이 임합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내 노력의 결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2. 지금 내 삶에서 '죽은 것 같은' 자리는 어디이며, 그곳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3. "우리니라"는 말씀 앞에서, 오늘 내가 스스로를 정죄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감사로 바꿀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합시다: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공로가 아닌 은혜로 저를 의롭다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만 의지하며 오늘도 믿음으로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