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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장 9절 칼럼n - 어둠 속에서도 빛을 지키는 힘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이 구절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위로의 메시지일 수 있지만, 종교적 배경을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때로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 구절은 그런 순간에도 내면의 선함과 정의가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을 전하며, 인간의 한계와 그 너머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먼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상징으로 읽힌다. 우리는 살면서 부당함을 겪거나, 약한 이들이 짓밟히는 모습을 볼 때 분노와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런 상황에서도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힘이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예를 들어, 역사 속에서 억압에 맞서 싸운 인물들-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혹은 이름 없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물리적 힘이 아닌 도덕적 신념으로 세상을 바꿨다. 그들의 발걸음은 흔들렸을지언정, 결국 보호받고 승리했다는 점에서 이 구절과 닿아 있다.

반면,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는 잘못된 길을 걷는 이들이 언젠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마주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종교적 심판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자연스러운 원리다.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이나 돈으로 약자를 억누르는 이들이 결국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본다. 금융 사기나 부패 스캔들로 몰락한 기업가들, 혹은 폭력을 일삼다 고립된 이들의 이야기는 이 구절이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어둠은 그들의 행위를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그들을 지켜주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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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라는 결론이다. 이는 물리적 힘이나 외적인 조건이 삶의 승패를 결정짓지 않는다는 강렬한 선언이다. 우리는 종종 성공을 돈, 지위, 혹은 체력으로만 측정하려 하지만, 진정한 힘은 내면에서 나온다. 병상에 누워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환자, 가난 속에서도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 혹은 재난 속에서 이웃을 돕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진리를 증명한다. 그들은 근육이나 무기가 아니라 마음의 강인함으로 이겨낸다.

이 구절은 신앙이 없어도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보편적으로 갈망하는 희망과 정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불공평해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선한 이들이 흔들리지 않고, 악이 영원히 승리하지 않으며, 진짜 힘은 내면에서 나온다는 믿음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선명해진다. 이 단순하면서도 깊은 진리는 오늘도 우리 발걸음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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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장 9절 강해 -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과의 만남

제목: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과의 만남
본문: 마태복음 28장 9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태복음 28장 9절은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과 여인들이 만나는 감동적인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평안하냐"라는 인사로 여인들을 맞이하시고,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만남을 넘어,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오는 평안과 경배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세 가지 포인트를 살펴보고, 관련 성경 구절을 통해 깊이 묵상하며, 삶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평안의 인사 (마 28:9a - "평안하냐 하시거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여인들에게 "평안하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인사는 단순한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인류에게 참된 평안을 주셨음을 상징합니다. 당시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과 슬픔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십니다.

-관주: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는 마음에 평안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의 승리가 가져오는 평안의 근거를 보여줍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혼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예수님의 "평안하냐"라는 음성을 기억하며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2. 여인들의 반응: 예배와 헌신 (마 28:9b -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그분의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단순한 스승이 아닌,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행동입니다. "발을 붙잡는다"는 표현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간절함과 헌신을 나타내며, "경배"는 그분께 온전한 존경과 예배를 드리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관주: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서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경배했던 모습과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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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여인들처럼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 경배하며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삶으로 인정하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3. 만남의 목적: 복음 증거로의 부르심 (마 28:10 연결)

마태복음 28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여인들의 만남이 단순히 개인적인 위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관주: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복음 전파의 시작입니다.

-적용: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그분의 평안을 누릴 뿐 아니라, 그 평안을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말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맺는말[Conclusion]:

마태복음 28장 9절은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오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하냐"라는 음성으로 다가오시며, 우리의 두려움과 슬픔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여인들은 그 만남 속에서 경배와 헌신으로 응답했고, 결국 복음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송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세상 속에서 그분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평안하냐"라고 물으신다면, 어떤 응답을 드리겠습니까? 그분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며, 그 평안을 세상에 전하는 제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을 구하며, 우리의 삶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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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편 7절 칼럼n - 의로움과 정직이 가져오는 빛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편 11편 7절의 말씀은 단순한 종교적 구절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이 구절은 의로움과 정직이라는 가치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이 말씀은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도덕적 나침반과 연결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마음을 일깨운다.

의로움은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을 넘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공정하게 행동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예를 들어, 길에서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행위는 작은 의로움의 실천이다. 이런 행동은 종교적 믿음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선하다고 느끼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때로 불공정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의로운 선택은 그 속에서 빛을 발한다. 시편의 이 구절은 의로움이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게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듯하다.

정직은 의로움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직한 사람은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실수를 감추거나, 더 나아 보이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정직은 결국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친구에게 실수를 솔직히 고백했을 때 오히려 신뢰가 깊어졌던 경험, 혹은 직장에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함으로써 오해를 풀었던 순간을 떠올려 보자. 정직은 관계를 단단히 하고, 마음에 평온을 준다.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라는 표현은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더 넓게는 정직함으로 자신과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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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약속하는 보상에 있다. 의로움과 정직을 실천하는 이들은 ‘그의 얼굴을 본다’는 희망을 품는다. 이는 신앙적인 맥락에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하지만, 일상에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과의 진실한 연결을 경험하는 순간들로 해석할 수 있다. 누군가를 돕고 나서 느끼는 뿌듯함,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화해했을 때의 따뜻함—이런 순간들이 바로 ‘얼굴을 보는’ 경험 아닐까.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런 감정은 삶의 의미를 더해준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의로움과 정직은 때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으로 보인다. 경쟁이 치열하고, 성공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듯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런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상기시킨다. 의로움과 정직은 단기적인 이익을 넘어, 우리 삶에 깊은 울림을 준다. 타인에게 신뢰를 주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힘은 어떤 물질적 보상보다 강력하다.

결국, 시편 11장 7절은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얼마나 의롭게,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완벽할 필요는 없다. 매일 작은 선택 속에서 조금 더 나은 방향을 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다. 이 말씀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선한 삶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의로움과 정직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초석이다. 그러니 오늘, 단 한 번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보자.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그의 얼굴’을 조금씩 보게 될 것이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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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7장 19절 칼럼n - 맹세와 배신: 인간의 약속에 담긴 무게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약속을 주고받는다. 친구와의 사소한 약속부터 가족 간의 깊은 맹세, 심지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조용한 결심까지. 약속은 인간 관계와 삶의 기본 틀을 이루는 요소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때로는 고의로 약속을 깨며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신뢰를 잃는다. 이 구절은 이런 배신의 무게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이 말씀은 비단 종교적 맥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약속과 배신, 그리고 그 결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다.

약속은 신뢰의 상징이다. 누군가와 약속을 나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며, 미래를 함께 구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예를 들어, 결혼 서약은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의 정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이혼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는 사랑과 헌신의 맹세가 깨지는 순간이 많아지고 있음을 뜻한다. 약속이 깨질 때, 남는 것은 상실감과 배신감이다. 에스겔의 구절에서 언급된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 인간 사이의 신뢰가 무너질 때 느끼는 깊은 실망을 떠올리게 한다.

배신은 왜 그렇게 아픈가? 그것은 우리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비밀을 누설하거나, 동료가 약속한 도움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심리학적으로 배신은 신뢰가 깨진 결과로 감정적 상처를 남기며, 때로는 신체적 스트레스로 이어지기도 한다. 에스겔의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라는 말은 배신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배신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의 배신은 경력의 몰락으로, 가정에서의 배신은 관계의 파탄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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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구절은 단순히 책임과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맹세와 언약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약속을 지키는 삶은 어렵지만, 그만큼 가치 있다. 작은 약속이라도 지킬 때마다 우리는 신뢰를 쌓고, 관계를 단단히 만든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아이에게 "널 사랑해"라고 말하며 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부모는 아이에게 안전감을 준다. 반대로,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안을 심어준다. 에스겔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네가 한 말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느냐?"

현대 사회는 약속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고 있다. 계약은 법으로 강제되지만, 마음에서 우러난 약속은 쉽게 잊힌다.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며 응원하겠다고 한 말이 다음 날이면 잊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에스겔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약속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걸고 하는 맹세다. 그것을 어길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준다. 배신의 대가는 외부에서 오는 처벌뿐 아니라 내면의 혼란과 죄책감이기도 하다.

결국, 이 구절은 우리 모두에게 공감과 성찰을 요구한다. 종교를 떠나, 약속과 배신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삶의 일부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약속을 지키고, 얼마나 쉽게 배신했는가? 그 선택의 무게를 다시 생각해보며, 오늘이라도 한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켜보는 건 어떨까. 그것이 신과의 맹세든, 사람과의 약속이든, 결국 그 가치는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말처럼, 약속은 우리의 삶 그 자체와 맞닿아 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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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장 26절 칼럼n - 의지할 곳이 있는 삶의 힘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삶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길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어떤 날은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며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지만, 또 어떤 날은 폭풍우처럼 거센 시련이 몰아쳐 발걸음을 흔들리게 한다. 이런 순간, 우리는 어디에 기대야 할까? 성경 구절인 잠언 3장 26절은 이렇게 말한다.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이 짧은 문장은 종교적 믿음을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하며, 그 힘이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준다는 메시지다.

의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지탱을 넘어 마음의 안정과 방향을 찾는 행위다. 누군가는 가족에게, 또 다른 누군가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며 힘을 얻는다. 혹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신념이나 자연의 섭리에서 평화를 발견하기도 한다. 잠언의 이 구절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본질은 우리가 각자 신뢰할 수 있는 존재나 가치를 통해 삶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점에 있다. 당신에게 그 의지처가 무엇이든, 그것이 있기에 우리는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과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다. 직장에서의 압박, 인간관계의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은 우리의 발을 걸리게 하는 돌부리와 같다. 예를 들어, 한 직장인은 매일 야근을 반복하며 지쳐갈 때,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의 미소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산책 중 마주한 바람 소리와 나무의 흔들림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처럼 의지할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것이 우리를 지탱한다는 점은 변함없다. 잠언의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는 약속은, 우리가 신뢰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어떤 험난한 길도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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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또한 우리에게 능동적인 태도를 제안한다. 의지한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힘을 찾고 붙잡으려는 노력이다. 어려움 속에서 주저앉기보다, 내가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돌아보고 그것을 단단히 붙잡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번쯤 생각해보자.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게 사람이라면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자연이나 내면의 가치라면 그것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결국, 잠언 3장 26절은 삶의 보편적인 진리를 담은 말이다. 우리는 모두 넘어질 수 있는 존재지만, 동시에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다. 그 힘은 우리가 의지하는 곳에서 온다. 종교적인 믿음이든, 인간관계든, 혹은 스스로 쌓아온 신념이든, 그것이 우리를 걸어가게 한다. 오늘, 당신의 발걸음이 흔들릴 때, 잠시 멈춰 무엇이 당신을 지켜주는지 떠올려보길 바란다. 그곳에 기대어 다시 한 걸음 내디디면, 걸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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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7절 칼럼n - 생명의 숨결: 우리 모두의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장 7절의 구절은 단순한 종교적 문장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구절은 특정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흙과 숨결이라는 두 요소는 인류의 기원을 상징하며, 동시에 삶의 연약함과 신비를 동시에 드러낸다.

먼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는 표현은 우리가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흙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의 토대다. 과학적으로도 인간의 몸은 탄소, 산소, 수소 등 지구에서 발견되는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점에서 창세기의 이야기는 현대 과학과도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이 땅으로 돌아간다. 이런 순환은 종교적 믿음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이다. 흙에서 왔다는 것은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를 상기시킨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해도, 우리의 뿌리는 그저 평범한 흙일 뿐이다.

그 다음으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는 부분은 생명의 신비를 이야기한다. 흙으로 빚어진 형체가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단순히 숨을 쉬는 행위를 넘어, 의식과 감정, 그리고 영혼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상징한다. 오늘날 의학은 심장이 뛰고 폐가 움직이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지만, 생명 그 자체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완벽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이 구절은 그 미지의 영역을 '숨결'이라는 아름다운 이미지로 표현한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であり, 매 순간 우리가 느끼는 생명의 경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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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이 주는 메시지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의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 아침에 눈을 뜨며 느끼는 신선한 공기,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숨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안도감—이 모든 것은 '생기'가 우리 안에 살아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매일 이 숨결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흙은 우리의 공통된 기원이고, 숨결은 우리의 공통된 생명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책임감을 일깨운다. 흙에서 왔다는 사실은 자연을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를 주고, 생기를 받은 존재라는 점은 그 생명을 존중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오늘날 환경 파괴와 인간관계의 단절이 심화되는 시대에, 이 구절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흙을 더럽히고 숨결을 빼앗는 행위는 결국 우리 자신을 해치는 일이다.

결국 창세기 2:7은 인간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이자,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초대장이다. 신앙이 있든 없든, 우리는 모두 흙으로 빚어지고 생기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다. 이 단순하면서도 깊은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서로를 존중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한다. 매일 아침 숨을 쉬며 하루를 시작할 때, 잠시 멈춰 이 숨결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같은 기원을 공유하는 한 가족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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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19장 13절 칼럼n - 힘을 내자, 더 큰 목적을 위해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성경 구절인 역대상 19:13은 요압이 전투를 앞두고 동생 아비새에게 건넨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전쟁터의 격려를 넘어, 삶의 모든 순간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힘을 내시고, 공동의 가치를 지키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이 말씀은 종교적 배경을 떠나 모두가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지혜를 전합니다.

삶은 때로 전쟁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싸움을 겪습니다. 직장에서의 경쟁, 가정에서의 갈등, 내면의 불안과 맞서는 일상은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요압의 말씀은 이런 순간에 필요한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너는 힘을 내라"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라는 다독임입니다. 힘을 내는 것은 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고, 누구나 지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 구절에서 더 주목할 점은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공동의 목적을 위한 노력입니다.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은 요압에게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오늘날 이는 가족, 친구, 이웃, 혹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잘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더 큰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삶에 의미를 더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은 자식을 위해, 선생님은 학생을 위해, 의사 선생님은 환자를 위해 힘을 내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작은 전투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이 우리를 버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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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은 결과를 통제하려는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노력했는데도 실패할 때,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칠 때, 이 문장은 마음을 다독이는 힘이 됩니다. 신앙이 없는 분에게도 이는 운명이나 자연의 흐름에 대한 수용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시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평온을 가져다줍니다.

이 구절은 3천 년 전의 이야기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줍니다. 힘을 내시라는 말씀은 지친 이에게 손을 내밀고, 공동의 가치를 강조하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조언은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위로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전투를 겪고 계시든, 이 말씀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힘을 내세요.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내면 됩니다." 결국, 삶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여정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요압의 이 한마디는 그 과정을 함께 걸어갈 동반자가 되어줍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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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5장 31절 칼럼n - 평화와 희망의 기원, 시대를 넘어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이 성경 구절은 수천 년 전 쓰인 기도이지만,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종교적 표현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악의 소멸과 선한 이들의 번영,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입니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삶 속에서 이런 소망을 품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주의 원수들이 망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적에 대한 저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단순한 개인적 복수가 아니라 부정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 표현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불공정, 억압, 폭력과 같은 ‘원수’를 마주합니다. 직장에서의 부당한 대우,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의 횡포, 혹은 환경 파괴와 같은 집단적 잘못까지—이 모든 것이 우리 삶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들입니다. 이 기도는 그런 어둠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읽힙니다.

이어지는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는 희망의 상징입니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새 시작, 생명, 그리고 빛을 뜻합니다. 신앙이 있는 이들에게는 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선한 가치-사랑, 연민, 진실-를 따르는 삶이 이 빛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침 해를 보며 새로운 기회를 꿈꾸듯, 이 구절은 우리 모두가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사랑하는 가족의 미소를 보거나, 어려움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때 느끼는 따뜻함이 바로 이 ‘해가 돋는’ 순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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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는 평화의 결실을 보여줍니다. ‘사십 년’은 성경에서 완전함과 안정의 상징으로 쓰이곤 하지만, 꼭 숫자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갈등이 끝나고 안식이 찾아온 상태,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을 뜻합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 개인이 두려움 없이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런 평화는 인류가 오랜 세월 추구해온 목표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크고 작은 평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평온을 만드는 일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특정 종교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불의를 거부하고, 희망을 품고,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은 인류 공통의 언어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신에 대한 기도로, 또 누군가는 인간에 대한 다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점입니다. 나는 어떤 ‘원수’와 싸우고 있는가? 어떤 빛을 키우고 싶은가? 그리고 내가 꿈꾸는 평화는 무엇인가?

결국, 사사기 5:31은 과거의 노래이자 현재의 거울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개인의 삶도 고난으로 가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어둠은 끝날 수 있고, 빛은 다시 떠오르며, 평화는 가능하다고. 당신이 어떤 신념을 가지든, 이 오래된 기도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작은 행동을 시작할 용기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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