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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 35절 칼럼 - 잃음으로써 얻는 생명의 역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현대 사회는 ‘보존’과 ‘확장’의 시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보험을 들고, 자산을 늘리며, 건강을 관리하는 데 막대한 에너지를 쏟는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곧 성공이요, 행복이라는 믿음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 본능의 절정에서 예수는 매우 당혹스러운 역설을 던진다.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는 수학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명제다. 1에서 1을 빼면 0이 되어야 마땅한데, 예수는 오히려 그것이 무한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 선언한다.

이 말씀에서 ‘목숨’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쉬케(psychē)’는 단순한 생물학적 호흡을 넘어, 자아(Ego)와 혼, 그리고 현세적인 삶의 총체를 의미한다. 즉, 예수가 말하는 ‘목숨을 잃는 것’은 단순히 순교와 같은 물리적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자아, 내 힘으로 내 인생을 통제하겠다는 교만, 그리고 나를 위해 쌓아올린 아성을 스스로 허무는 ‘자아의 죽음’을 포함한다.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성결’의 은혜 역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옛 자아가 죽지 않고는 결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삶을 움켜쥐려 할수록 오히려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모래를 손에 꽉 쥐면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집착할수록 삶의 본질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자기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삼는 순간, 인간은 끝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노예가 된다.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은 결국 영혼을 고갈시키고 피폐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구원하고자 하면 잃게 되는’ 비극이다.

반면,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전제는 이 상실을 거룩한 승화로 이끈다. 무조건적인 자기 포기가 아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이라는 가치에 나를 던질 때, 비로소 참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약속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 내 안의 욕망과 기득권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풍성한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진정한 신앙은 내 손에 쥐어진 것을 놓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내가 쥐고 있던 낡은 생명줄을 놓아야, 하나님이 내미시는 영원한 생명의 손을 잡을 수 있다. 잃는 것이 두려워 움츠리고 있는가? 예수의 역설을 기억하라. 가장 소중한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드릴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죽어야 산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살길이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현대 사회가 정의하는 '자기를 지키는 삶'과 예수가 말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2. 본문에서 말하는 '목숨(프쉬케)'을 오늘날 우리의 일상적인 영역(직장, 가정, 인간관계 등)에 대입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하는가?

3.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목적이 빠진 단순한 희생이나 자기 포기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어떤 한계를 가지는가?

p.s: 진주 충만성결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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