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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 12절 묵상 - 하늘의 일을 믿으라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는 단순한 신학 토론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최고 지식인이었던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남(γεννηθῇ ἄνωθεν, 게넨떼 아노덴)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πνεῦμα, 프뉴마)의 비유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셨지만, 그는 여전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12절의 말씀은 바로 이 맥락에서 나온 탄식 섞인 도전입니다. "땅의 일"(τὰ ἐπίγεια, 타 에피게이아)은 바람처럼 눈에 보이는 성령의 역사, 즉 경험 가능한 영역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늘의 일"(τὰ ἐπουράνια, 타 에푸라니아)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 삼위일체의 신비, 인자가 들려야 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눈앞의 비유조차 믿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더 깊은 하늘의 계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이성이 지닌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믿음(אֱמוּנָה, 에무나)'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전 존재를 맡기는 신뢰입니다. 니고데모의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신뢰의 부재였습니다. 그는 율법과 전통이라는 자신의 인식 틀 안에 예수님을 가두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일은 인간의 틀을 초월합니다.

성도의 삶에도 이 도전은 동일하게 찾아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섭리가 이해되지 않을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고, 고난의 이유를 모를 때,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가 신앙의 전제 조건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오히려 신앙이 이해를 열어가는 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안에서 하늘의 일들을 가르치십니다(요 16:13). 그 가르침은 논리의 방식이 아니라 조명(illumination)의 방식으로 임합니다. 땅의 언어로 다 담을 수 없는 하늘의 실재를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 새겨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아멘"이라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부터 난 믿음의 본질입니다.

니고데모는 결국 변화되었습니다. 요한복음 7장과 19장에서 그는 예수님을 변호하고, 십자가 이후 몰약과 침향을 가져와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냅니다. 하늘의 일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던 그가, 마침내 그 하늘의 일 - 십자가 - 앞에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그 걸음이 이미 믿음의 시작입니다.

말씀 묵상에 대한 질문:

1. 내 삶에서 "땅의 일"조차 믿기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였으며, 그때 나는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나는 신뢰를 선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해를 먼저 요구하고 있습니까?

3. 니고데모처럼 나를 가로막는 기존의 "인식의 틀"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그것을 어떻게 넘어서도록 인도하고 계십니까?

기도합시다:

주님, 땅의 일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성령의 조명으로 하늘의 일을 깨닫게 하옵소서. 니고데모가 결국 십자가 앞에 나아왔듯, 우리도 이해보다 신뢰를 앞세워 주님 앞에 날마다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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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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