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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3절 강해 설교 - 낮아짐의 위대함

제목: 낮아짐의 위대함
구절: 빌립보서 2장 3절

"아무 일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서론: 오늘 우리는 성도의 삶에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 앞에 섭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그는 고난 중에도 기쁨을 노래하며, 교회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 하나 됨의 열쇠로 제시한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다툼도, 허영도 아닌 오직 낮아짐 -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1. 다툼을 버리십시오 (빌 2:3a)

강해: 바울은 "아무 일도 다툼으로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다툼'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리테이아(ἐριθεία, 에리쎄이아)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품삯을 받고 일하는 삯꾼 노동자를 가리키던 말로, 점차 사리사욕을 위해 당파를 짓고 분쟁을 일으키는 태도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단어를 정치적 야심과 자기 이익을 위한 파당 행위에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은 매우 의도적입니다. 교회 안의 다툼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이기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도 마돈(מָדוֹן, 마돈)이라는 단어가 다툼과 분쟁을 가리키며, 잠언은 "다툼의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으니라"(잠 17:14)고 경고합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이기심입니다.

해설: 갈라디아서 5장 20절은 에리테이아를 육체의 일 목록에 나란히 올려놓습니다. 야고보서 3장 16절은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느니라"고 선언합니다. 다툼은 단지 불편한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는 영적 독소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도 도나투스 논쟁, 종교개혁 시대의 분열 등 많은 상처가 교리 자체보다 이기심에서 시작된 파당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적용: 오늘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마음으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내 주장을 관철하려는 싸움이 사실은 에리테이아가 아닌지 돌아보십시오. 다툼을 버리는 첫걸음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보는 것입니다.

2. 허영을 내려놓으십시오 (빌 2:3b)

강해: 바울은 이어서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허영'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케노독시아(κενοδοξία, 케노독시아)입니다. 케노스(κενός, 케노스)는 '텅 빈', 독사(δόξα, 독사)는 '영광'이라는 뜻으로, 곧 '속이 빈 영광', '실속 없는 자랑'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내용이 없는 명예욕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헤벨(הֶבֶל, 헤벨) - 전도서가 "헛되고 헛되다"고 탄식할 때 쓴 바로 그 단어 - 이 그 의미와 가장 가깝습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정은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텅 빈 영광을 쌓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해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6:1)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금식이 허영의 전형적인 예로 제시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를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공연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케노독시아는 예배까지도 자기 과시의 무대로 만들 수 있는 무서운 함정입니다.

예화: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설교자 드와이트 무디(D. L. Moody)는 한 젊은 목사가 설교를 마친 뒤 "오늘 설교 어떠셨습니까?"라고 자랑스럽게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가 '나'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세어 보게나." 그 젊은 목사는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설교단에서도, 예배당에서도, 가정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구할 수 있습니다. 무디 자신은 평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만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다"는 고백으로 살았습니다. 허영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그 자리를 채우십니다.

적용: 내가 봉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하는 동기를 점검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까? 케노독시아를 내려놓는 것은 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를 찾는 길입니다.

3.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빌 2:3c)

강해: 바울은 마침내 긍정적 명령을 선포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겸손한 마음'의 헬라어는 타페이노프로쉬네(ταπεινοφροσύνη, 타페이노프로쉬네)입니다.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는 '낮은', 프렌(φρήν)은 '마음, 생각'을 뜻합니다. 곧 '낮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흥미롭게도 고대 헬라 문화에서 이 단어는 비겁하고 비천한 노예의 심리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단어를 덕목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이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은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아나바(עֲנָוָה, 아나바) - 겸손, 온유 - 가 보여주듯,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확히 알기에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해설: 로마서 12장 10절은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낮은 마음은 결국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몸의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적용: 오늘 내 옆에 있는 사람 - 배우자, 자녀, 동료 성도 - 을 나보다 낫다고 여겨 보십시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두신 형상과 은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타페이노프로쉬네는 내가 결단할 때 시작됩니다.

맺는말[Conclusion]:

오늘 빌립보서 2장 3절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요청합니다. 다툼을 버리고, 허영을 내려놓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명령처럼 보입니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높이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능을 이기는 길은 더 강한 의지가 아니라 더 깊은 복음의 이해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빌 2:6–7). 그분이 낮아지신 것은 나를 높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복음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낮아질 수 있습니다. 복음이 내 안에 뿌리내릴수록 에리테이아와 케노독시아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겸손은 수련의 결과가 아니라 복음의 열매입니다.

진주충만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한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작은 결단에서 교회의 하나 됨이 시작됩니다. 가정에서 먼저 실천하십시오. 직장에서, 그리고 이 예배당에서 실천하십시오. 낮아짐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 우리도 함께 걷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관련 질문:

1. 나는 최근 어떤 상황에서 '다툼(에리테이아)'의 태도로 반응했습니까? 그 뿌리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2. 내가 섬기는 일, 예배하는 태도 중에서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허영(케노독시아)'이 섞여 있는 부분은 어디입니까?

3. 지금 내 삶 속에서 내가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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