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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14절  칼럼 - 나는 네 이름을 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세상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지만,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드물다. 직장 동료의 이름은 알아도 그 마음속 두려움은 모르고, 오랜 친구라 해도 그 깊은 상처까지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다. 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단 한 마디로 그 모든 피상적 관계를 뛰어넘는 앎을 선언하신다. "나는 내 양을 안다."

헬라어 원문에서 '안다'는 단어는 기노스코(γινώσκω, 기노스코)이다. 이 단어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깊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인격적·친밀적 앎을 뜻한다. 히브리어 구약의 야다(יָדַע, 야다)와 같은 결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모태에서부터 아셨다(렘 1:5)고 하실 때 쓰인 바로 그 앎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우리의 이름과 얼굴만이 아니라, 우리의 두려움과 실패와 눈물과 소망까지 꿰뚫어 보신다는 뜻이다.

'선한 목자'라는 표현도 흘려 읽어선 안 된다. 헬라어로 칼로스 포이멘(καλὸς ποιμήν, 칼로스 포이멘)인데, 여기서 '선한'에 해당하는 칼로스(καλός)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다는 의미를 넘어 '아름답고, 이상적이며, 완전히 그 역할에 합당한'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목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구현하시는 분이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앎의 깊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하셨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앎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사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는 방식은 신성 안의 가장 깊은 사랑의 방식과 동일한 차원이다. 우리는 그처럼 깊고 완전한 앎의 대상이다.

이 진리는 오늘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말을 걸어온다. 때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나의 상황을 모르시는 것 같다고 느낀다. 기도는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 같고, 나는 군중 속의 한 얼굴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걸음걸이와 울음소리를 구별하신다. 그분은 당신을 모르는 척하지 않으신다. 당신을 알고, 부르시고, 이끄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유명해지는 것도, 더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다. 나를 완전히 아시는 분께 알려지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이다. 선한 목자의 음성은 오늘도 들린다. 두려움의 골짜기에서도, 지친 일상의 한가운데서도.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며 완성이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예수님께 '알려진 존재'라는 사실이 지금 내 삶에서 어떤 위로와 용기가 되는가?

2.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 이유는 그분이 침묵하시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다른 소리에 귀를 빼앗긴 것인가?

3. '선한 목자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신앙 지식인가, 아니면 삶을 바꾸는 인격적 관계인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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