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6장 23절 칼럼 - 기쁨, 역설의 선물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고통 앞에서 기뻐하라는 말처럼 불편한 명령이 또 있을까. 예수님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받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그 절정에서 오늘 이 구절이 터져 나온다. "기뻐하고 뛰놀라." 이것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시선의 전환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고난 너머에 있는 실재(實在)를 보라는 초청이다.
세상은 기쁨의 조건을 풍요, 성공, 안락에서 찾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쁨은 조건을 뛰어넘는다. 헬라어 원문은 "기뻐하라"를 χαίρετε(카이레테), "뛰놀라"를 σκιρτήσατε(스키르테사테)로 표현했다. 후자는 아이가 환호하며 뛰는 모습, 혹은 태아 요한이 마리아의 방문에 기뻐 뛰놀던 그 생동감 넘치는 기쁨이다(눅 1:41). 이것은 이성이 아닌 존재 전체로 터지는 기쁨이다.
역사 속 하나님의 사람들, 이사야에서 예레미야에 이르는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핍박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시대의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예수님은 오늘 이 구절에서 수난의 계보를 언급하신다. 고난받는 성도는 그 위대한 반열(班列)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개를 들 이유가 충분하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는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히브리적 사유 속에서 '상(賞)'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응, 곧 샬롬의 완성을 뜻한다. 고난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섭리가 깊이 개입된 현장이다. 지금 겪는 억울함과 외로움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영원한 무게를 지닌 상급으로 쌓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다르지 않다. 옳은 말을 했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손해를 보고, 선을 행한다는 이유로 오해받는 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럴 때 이 구절은 냉소나 체념이 아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는 도전이다. 고난이 종착역이 아니라 통과역임을 기억하는 자만이 역설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기쁨은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힘겹더라도, 하늘에 새겨지는 상급을 바라보며 뛰어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 고난의 자리가 곧 축복의 자리임을 믿는 믿음,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역설의 선물이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지금 어떤 고난이나 억울함을 겪고 있으며, 그 상황에서 '기뻐하고 뛰논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2. 세상이 정의하는 기쁨의 조건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쁨의 근거는 어떻게 다른가?
3. 고난의 자리에서 '하늘의 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훈련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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