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14장 7절 칼럼 - 가난한 자와 함께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베다니의 한 집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제자들은 그 값비싼 나드 향유가 낭비라고 분개했다.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는 말은 언뜻 옳게 들린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계산을 단번에 뒤집는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을 외면해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항상'은 *판토테*(πάντοτε, 판토테)로, 언제나·끊임없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오히려 가난한 자를 돌볼 기회가 우리 삶에 끊임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신명기 15장 11절의 말씀,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는 구약의 사회적 책임을 그대로 잇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은 우선순위의 문제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신 마지막 날들을 직감하고, 그 귀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헬라어로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에서 '있지 아니하리라'는 *우크 에코*의 미래형으로, 임박한 이별을 가리킨다. 여인의 행동은 충동이 아니라 영적 감수성에서 나온 예배였다.
우리 시대는 효율과 실용을 앞세운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를 따질 때 눈에 보이는 숫자와 결과를 우선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산 너머에 있는 사랑의 행위를 귀히 여기셨다. 그 여인의 이름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억되리라는 약속이 그 증거다. 진정한 헌신은 언제나 그 시대의 기준을 초월한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과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둘 다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 있다. 다만 우리는 종종 형식적인 선행으로 참된 예배를 대신하려 하고, 반대로 예배를 핑계로 이웃을 외면하기도 한다. 이 본문은 그 두 가지 왜곡 모두를 조용히 바로잡는다.
오늘 우리 곁에도 가난한 자가 있고, 예배의 자리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기 전에,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지혜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방식은 이제 성령으로,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 곁의 가난한 이웃의 얼굴로 이어지고 있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가?
2. 여인처럼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알아채고 행동한 적이 있는가?
3. 나의 헌신이 타인의 시선이나 효율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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