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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 5절 칼럼 - 껍데기만 남은 신앙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 시대는 '보여주기'의 시대다. SNS에 올린 예배 사진, 줄줄 외우는 성경 구절, 교회 직분의 화려한 타이틀.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섬뜩한 경고 하나를 남겼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형식은 있는데 실체가 없는 신앙,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텅 빈 종교성. 바울이 경고한 이 모습이 혹시 오늘 우리 자신의 초상은 아닐까.

헬라어 원문에서 '모양'에 해당하는 단어는 μόρφωσιν(모르포신)으로, 외형적 형태나 윤곽을 뜻한다. 반면 '능력'은 δύναμιν(뒤나민)으로, 폭발적인 내적 힘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두 단어를 날카롭게 대비시킨다. 경건의 형태는 갖추었지만, 그 안을 채워야 할 살아있는 능력-즉 성령의 역사-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참된 신앙(אֱמוּנָה, 에무나)은 단순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신실함이다. 모양만의 경건은 그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다.

이 경고가 무서운 이유는 이것이 '불신자'가 아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3장 앞부분을 보면 바울은 말세에 나타날 사람들의 목록을 열거한다-자기를 사랑하는 자, 돈을 사랑하는 자, 자랑하는 자, 거만한 자. 그러나 그 마지막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라고 덧붙인다. 이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니다. 예배당 안에, 직분자 명단 안에, 어쩌면 강단 위에도 있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경건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거창한 신비 체험만을 말하지 않는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용서를 선택하는 힘, 손해를 보면서도 정직을 지키는 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 앞에 서는 힘-이것이 바로 δύναμιν(뒤나민), 살아있는 경건의 능력이다. 이 능력의 원천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내주 없이 경건은 결국 피곤한 종교적 의무로 전락한다.

바울은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명령한다. 이는 판단하고 정죄하라는 말이 아니다. 형식적 경건에 전염되지 말라는 뜻이다. 모양만의 신앙은 전파된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분위기,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신앙 태도가 나를 빚는다. 성도는 의도적으로 살아있는 경건을 가진 공동체와 사람을 선택하고 가까이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의 신앙은 '모양'인가, '능력'인가. 예배의 습관은 있는데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대화는 끊어진 것은 아닌가. 직분은 있는데 섬김의 기쁨은 사라진 것은 아닌가. 바울의 경고는 우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를 벗고 다시 실체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초청이다. 경건의 능력은 여전히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칼럼에 대한 질문:

1. 나는 지금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가?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2. 형식적 경건에 '전염'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3. 오늘 나의 삶에서 δύναμιν(뒤나민), 즉 살아있는 경건의 능력이 필요한 구체적인 순간은 어디인가?

p.s: 진주충만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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